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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한 주노씨 Dec 19. 2022

문송하지 않습니다

나이 들수록 커지는 문과생의 행복

얼마 전 수능이 끝났다. 이번에도 당락의 향배를 가르는 건 수학점수란다. 상대적으로 수학점수가 좋은 이과생들이 문과로 교차지원을 할 수 있다니, 고교 진학 후 문과 이과를 나눈다는 게 이제 무의미해 보인다. 대학에서 문과를 전공하려는 학생들도 일단 이과를 선택해서 수학점수를 높인 뒤 뒤늦게 본인이 원하는 문과 학과를 선택하는게 합격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이래저래 '문송(문과라 죄송)'한 세상이다. 수학은 좀 못할지언정 국어와 암기과목만 잘해도 '인서울' 대학은 갈 수 있던 그 시절에 태어난 게 정말 다행이다.


문과가 인기없는 건 당연히 취업이 어려워서다. 대기업의 캐시카우는 대부분 첨단 과학과 공학관련 제조업이기에 영어 외에 이젠 코딩같은 이과적 지식이 먹고 사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됐다. 로스쿨이 생긴 뒤 법학과는 무용지물이 됐고 스타트업 창업을 위해서도 경영학과보단 it 관련 학과를 전공하는게 유리해 보인다. 구글번역기가 있으니 외국어 능력도 과거처럼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는 자조섞인 말이 있 듯, 대학원 진학 후 교수가 되기엔 돈도 없고 빽도 없다.  

졸업 후 배는 곯더라도 예술 자체에 대한 흥미와 자기만족을 위해 예체능을 전공했던 거처럼 팍팍한 요즘 세상에 학문의 즐거움만으로 문과를 선택한다는 건 '딴따라'처럼 취급받기 십상이다.


다소 이분법적인 해석일테지만 이과생들에게 문과생들은 보통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몽상가로 치부되기 일쑤다. 정확한 팩트와 수치 대신 온갖 비유와 은유, 풍자와 역설, 더 나아가 약간의 지적허영과 선문답까지 듣고 있으면 이과생들은 으레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란 반응을 보이곤 한다. 문과생들은 그런 이과생과 대화하는 게 마뜩치 않다. 때론 과감한 생략과 완곡 화법을 했음에도 그 행간을 읽어 대화의 의도를 캐치한 뒤 내가 기대하지 않은 의외의 반응으로 티키타카하는 지적 쾌감을 맛보고 싶지만 이과생들에겐 가급적 정확한 완성문 형태의 표현을 해줘야 한다. 중간에 통계 수치와 참고문헌을 곁들여 주면 더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 준다.


제주에 첫 눈이 내린 지난 어느 오후, 공항가는 차 안 라디오에서 잔잔한 캐롤이 흘러 나왔다. 몽환적이면서 짠하고 쓸쓸한 그 순간을 단어 몇 개로 표현하기가 아쉬웠다. 잠시 감상에 빠진 뒤 옆자리 선배에게 그 느낌을 구체화해 설명했다. '형, 난 연말연시를 대부분 혼자 보내서 그런지 캐롤이 흐르면 이런 이미지가 떠올라. 눈이 쌓인 한산한 주택가 거리 풍경을 비춘 카메라가 집안으로 쑥 들어가. 그럼 웃고 있는 따뜻한 가족의 모습이 보이는데 난 거기에 없어. 마치 스크린 밖에서 나와는 상관없는 크리스마스 풍경을 보고 있는 스쿠루지 유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일테지만 어떤 디테일한 감정선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했다란 느낌이 들때 난 문과라서 감사하고 행복해진다.

제주에 내려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목수나 쉐프처럼 자영업자로서 먹고 사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잠시 부러웠지만 결국 문과생 광고쟁이로서 체득한 '액면보다 근사하게 보이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게스트들에게 즐거움을 준 것 같아 또한 감사하고 행복하다.   


2~30대 취업이 급한 젊은 세대에겐 문과가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점점 시간이 많아 단순하게 살아지게 되는 중장년이 되면 문과를 전공한 보람이 시나브로 커진다. 체력이 떨어지다보니 정적인 활동으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시적 감수성과 인문학적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젊을 땐 실용서적만 읽고 소설을 읽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나조차도 요즘 소설책만 본다. 그것도 우리말의 말맛과 의미를 오롯이 전달하는 국내 소설에만 손이 간다.

젊은 시절 외적으로 멋진 이성에게 끌렸다면, 나이가 들수록 내가 하는 말을 철썩같이 알아듣고 자신의 생각을 적절한 비유와 위트로 버무린 뒤 의외성 있는 쉬운 단어로 장식해 날 웃게 만드는 이성에게 마음이 간다. '오빠랑 얘기 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즐겁다, 얘기하려고 결혼한 거 같다'란 이효리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이들수록 모든 성감대는 입과 귀로 이동한다.

여기서 잠깐, 이과생들이 문과적 취미를 장착한다면?

가히 '연애계'의 어벤져스라 하겠다.


문과여서 죄송해 하지 말고

문과임을 찬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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