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츠비 Aug 27. 2023

[기러기의 일기 21]

분리수거

습관 때문에 주말에도 4시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그래도 주말이니까 30분 정도 뭉그적거려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잠시 핸드폰을 쥐고 유튜브를 켰다. 간밤 손흥민 선수의 활약으로 유튜브가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던 찰나, '아 오늘 할 거 많다.'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는지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내 나름의 요가, 스트레칭을 거쳐 명상에 이르렀다. 최근엔 명상을 할 때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하거나 일부러 특정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평소처럼 그저 내 마음이, 내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명상을 마친 후 영양제들과 물을 흡수하고, 밀린 설거지를 한 뒤 방탄커피를 내려와 소파에 앉는다. 커피와 함께 잠시 핸드폰으로 스포츠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있자니 다시 누가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는다. 그래, 뉴스 볼 시간이 아니고 영어 공부 할 시간이다. 나도 안다.


주말에도 예외 없이 기상 후 한 시간 남짓의 루틴을 마무리하고 나니 일주일 동안 쌓인 생활의 흔적들로 인해 어지러운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눈에 보였을 때 해치우자. 분리수거해야 할 쓰레기만 세 꾸러미가 나온다. 쓰레기 더미에 묻혀 살았구나 싶다. 아내가 곁에 없는 남자는 보통 이렇지 않을까? 나는 그래도 좀 깨끗하고 깔끔하게 해 놓고 사는 편 아닐까? 하고 자위해 보지만, 코로나로 인해 1년 정도 떨어져 있었던 아내가 중국으로 복귀했을 때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청난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상황이 떠올라 이내 인정하고 말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깔끔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오전 5시 반. 해는 이미 한참 전에 떠올라서 매우 강렬한 눈빛을 쏘아댄다. 그래도 더 더워지기 전에 분리수거를 다녀오는 게 낫겠지. 이 많은 쓰레기를 그때그때 버리지 않고 한 번에 내다 버리는 모습을 이웃 주민들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분리수거 쓰레기 세 꾸러미를 한가득 안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벌써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옆집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이웃에게 이 많은 쓰레기를 한 번에 몰아서 버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일찍 '사사삭' 버리고 오려던 내 계획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옆집 할머니다. 사실 요즘엔 손주를 뒀다고 해서 내가 손주가 아닌 이상은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애매하다. 다들 너무 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는 아빠, 엄마보다는 빨리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고 싶으신 것 같다. 여보야 힘내자.)


몇 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은 있지만,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양의 쓰레기를 들고 있으니 인사를 건네기가 부끄러웠다. 옆집 젊으신(?) 할머니도 분리수거 쓰레기를 들고 나오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어색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다 보니 로비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먼저 앞서 걸어가셨고, 물론 걸음도 더 빠르고 보폭도 넓은 나지만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가 꽉 움켜쥔 분리수거 쓰레기가 담긴 커다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시작된 내적갈등. 인사를 건네려 했으면 벌써 건넸어야지 이제 와서 쓰레기 무거우니까 들어드리겠다고 갑자기 말하기도 뭐 하고, 중국에 오래 살았어도 업무적인 회화가 아닌 일상 회화엔 자신이 없어서 항상 두렵고. 이유야 많지만 어찌 됐든 지금 저 쓰레기를 들어드리고 싶은 내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가로막고 있는 건 내향적인 극 I 성격이다. 이럴 땐 정말 내 성격이 싫다.


오늘 뒤통수만 몇 번을 맞는 거지? 이번엔 누가 딱밤으로 뒤통수를 공격한 느낌. 결국 딱밤에 떠밀려 수줍음을 억누르고 '아이' 하고 불렀다. 이모 내지는 아주머니라는 느낌의 호칭이다. 세 꾸러미의 내  쓰레기를 한 손에 움켜쥔 후 할머니가 들고 계신 쓰레기봉투를 향해 손을 내밀며 '그거 제가 들어드릴게요.' 했다. 할머니는 살짝 미소를 띠며 뭐라 뭐라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느낌적으로 의역하자면 '별로 안 무거운데, 고마워' 정도였달까. '무거워 보이셔서요.' 하고 넘겨받은 쓰레기를 들었는데,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내 마음도 가벼웠다.


그렇게 분리수거를 마치고 할머니는 가족들 아침거리를 준비하신다며 새벽 시장으로 향하셨고, 나는 집으로 올라왔다. 다음엔 마주치면 살갑게 인사해 봐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기러기의 일기 2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