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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08. 2024

오! 사카


나를 낳기 전, 그러니까 이십칠 년 전에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방콕이 엄마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다. 올해 따끈하게 수능을 끝낸 막내 역시 여행이라곤 부산과 서울이 전부다. 런던에서 길을 헤매거나 파리에서 에펠탑을 본 기억은 나를 뺀 우리 가족 그 누구에게도 없다. 치앙마이에서 짚라인으로 산을 타 내려오거나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한 추억 역시 나밖에 없다. 그런데 계획을 짤 여유와 시간이 없어 신혼여행조차 단체 패키지로 다녀온 엄마가 내 입김에 힘입어 막내와의 자유 여행을 염두하고 있다.


두 달 뒤면 막내와 엄마는 오사카 골목에서 라멘을 맛보거나 교토에서 고즈넉한 풍경을 누리고 있을 테다. 없는 돈을 끌어모아 나도 함께 일본행 비행기를 타려 했지만, 그렇다면 언제나 타인의 결정에 기대는 막내와 엄마가 내게 한껏 기댈 게 분명하다. 오로지 내가 추천하는 음식점을 가고 내가 추천하는 관광 명소를 다녀올 테니까 잘 다녀오라며 응원을 주는 게 할 일의 전부다. 자유 여행이 주는 묘미를 직접 느끼기 위해서는 직접 가는 게 제일이다.


일본이 아니면 유럽도 필요 없다던 막내는 과연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여행의 일정을 잘 짜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 아니오다. 자타공인 집돌이 막내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제주의 온갖 자연 명소를 체험학습지에 적어놓고는 한라산부터 미술관까지 이곳저곳을 방문하느라 진이 빠졌다. 심지어 국가 장학금을 제때 신청하라는 내 메시지를 보고 “나중에 하면 안 됨?”이라고 답장하다가 나한테 혼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사람의 성향을 굳이 계획형과 미루기형으로 나눈다면 완벽하게 미루기형일만큼 막내는 모든 걸 미룬다. 심지어는 밥을 먹을 때마저 미룬다. 엄마는 새벽부터 자정까지 김밥을 싸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둘이 ‘일본 자유 여행’을 3박 4일 동안이나 다녀온다는 이야기는 가족인 나조차도 아직 못 믿겠다. 비행기는 끊었는지, 숙소는 괜찮은 곳으로 예약했는지, 돈을 아끼겠다며 너무 가성비를 따지지는 않았는지, 유심부터 데이터 로밍은 어떻게 할 건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만 그러면 나에게 부탁할 게 뻔해서 역시 잘할 거라며 응원을 하는 게 할 일의 전부다.


내가 처음 여권을 만들어 떠난 곳 역시 오사카와 교토이기에, 두 시간이면 다른 나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워 사진만 하루에 천 장 가까이 찍었던 일정을 떠올리면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많다. 첫째, 가성비 에어비앤비는 피할 것. 맨 마지막 날까지 좋은 숙소에 머물면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정작 막내나 엄마에게는 숨기고 이곳에 낱낱이 공개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지만, 어쨌든.


내가 일본에 갔을 때를 떠올리면 마지막 날을 빠뜨릴 수 없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날이니까 가장 저렴한 숙소에 머물었다가 전기가 다 끊기는 불상사를 만났다. 당연히 스마트폰 배터리도 없고, 보조 배터리도 없어서 길을 잃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그러니 여행할 때의 둘째 팁은 ‘보조 배터리를 꼭 챙겨 다닐 것’이다.


셋째는, 계획형 인간이 아닌 엄마와 막내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여행 계획을 너무 촘촘하게 짜도 재미없다는 것. 이 커다란 사원은 역시나 이렇게 생겼구나, 저 맛집은 역시나 이게 대표 메뉴구나……를 기억하다 보면 머리가 아플 뿐만 아니라 한 차례 여행을 다녀온 기분마저 든다. 그러니 큰 계획은 짜되 설렁설렁 다녀올 것. 카메라보다 풍경을 볼 것은 네 번째로 건네고 싶은 이야기다.


막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다가 괜한 잔소리로 들릴 것 같아서 좋아하는 여행 앱 하나를 보냈다. 그 앱으로 일정을 짜면 장소의 최단 거리가 지도로 한눈에 보일뿐더러, 맛집과 관광지까지 추천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전했다. 소위 ‘아재 개그’라 불리는 유머를 좋아하는 막내는 내 말에 웬일로 “오!”라는 감탄사를 뱉었다. 내가 “뭘 또 그렇게까지……”라는 답장을 쓰며 헤벌쭉 웃고 있을 때 짧은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사카.”


진짜로 하나도 웃기지 않은데 엄마는 이 말을 들으면 또 자지러지게 웃을 게 분명해서, 어떻게 그런 말솜씨를 하냐며 역시 막내의 머리는 비상하다는 투의 이상한 칭찬을 할 게 확실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의 제목을 쓰려니 막내의 유치 찬란한 개그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그걸로 적었다. 왠지 분하다. 막내의 유머를 이렇게 실용적으로 쓰다니 진 것 같다.


당장 이번 주에 마감되는 국가 장학금을 신청하는 일마저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는 막내가 제때제때 여행을 많이 떠났으면 좋겠다. 둘째는 독일에서 살고 싶다며 독일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독일을 포함한 어떤 나라도 가보지 못하고, 여권조차 만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잊는다. 기억하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뛴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던, 나아가 해외에서 살고 싶다던 둘째의 소망을 막내에게 투영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막내가 나처럼 이십 대를 여행으로 잔뜩 보냈으면 좋겠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꾸리는 작은 마트의 건물 기간이 종료되거든 엄마가 좋아하는 나라에 한 번 다녀왔으면 좋겠다. 엄마는 우리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는 잘 알지만 정작 엄마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니 나도 엄마가 어떤 나라를 다녀올지 궁금하다.


언젠가 그 둘이 여행을 무사히 잘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글을 적는다.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 일본도 패키지여행으로 가면 안 되겠냐는 엄마를 말리느라 얼마나 진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자유 여행이 주는 한적함과 느긋함을 즐기기를 바라는데 엄마는 여행 전에 할 일이 너무 많다며 벌써부터 지쳤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막내에게 “엄마 좀 도와줘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웬일로 기이한 농담을 하지 않고 “알겠읍니다!”라는 막내.


언젠가 막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제로 한 권의 책을 꾸리고 싶다. 평소에는 유치 찬란한 농담을 받고 정색하느라 진지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오글거린다는 말을 들을까 봐 용기 내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다. 막내와의 얘기를 책으로 썼을 때의 첫 줄을 벌써부터 적어보자면 이렇다.


“엄마와 오사카 여행을 다녀온 막내에게. 내 책은 언제쯤 읽어줄 거니? 두 권이나 나왔는데…… 장난이고 이 책만 읽어줘도 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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