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만 원짜리 폭포가 가르쳐 준 것
요즘 점심시간이면 한 시간 남짓, 오디오북을 들으며 산책을 한다.
서울 출근 때는 운동할 곳이 없어 산책이 유일한 선택지였는데, 평택 출근 때는 사내 피트니스 센터가 있어 고민이 생긴다. 산책을 할까, 운동을 할까. 어제는 그냥 책이 더 듣고 싶어 산책을 선택했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선택지가 없으면 그냥 하는데, 더 좋은 선택지가 있으니 고민하게 되는. 예전에 JB에서 '식당개선위원'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구성원들의 백 가지 제언 사항을 들으며 "식당이 없으면 '식당이 있으면 좋겠어요!' 하나만 나올 텐데, 식당이 있으니 이렇게 요청사항이 백만 가지가 나온다"고 생각했었다.
최근 박정민 배우의 책을 듣고 있다. 놀라운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이렇게도 글을 쓸 수 있구나.
처음에는 "자기 일기를 글로 써놨다고? 돈 내고 읽으라는 건가?" 싶었다. 듣다 보니, 생각보다 얻는 게 많다.
둘째, 성우 vs 배우.
박정민 작가가 직접 읽어준다. 처음에는 둔탁한, 목이 쉰 듯한 소리가 영 거슬렸다. '혹시 성우가 읽어주는 버전 없나' 싶었는데, 배우가 직접 읽다 보니 맛깔나게 살리는 문장들이 꽤 있다. 듣다 보면 툭툭 웃게 된다.
마지막, 경험의 중요성.
이 책은 박정민 배우가 겪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겸손하게 아무것도 아닌 척하지만, 아르바이트 이야기, 배우 생활 이야기, 여행 이야기를 툭툭 풀어낸다.
나도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 R&D 시절, 한 번 해외 출장을 가면 한 달 이상씩 가는데도 어디 여행을 가지 않았다. 주말에도 출근해야 하는 게 대부분이긴 했지만, 쉬는 주말에도 그냥 호텔에 머물러 있기 일쑤였다. 마케팅 업무를 할 때도 그렇게 해외를 자주 들락거렸지만, '브라질은 위험해!'라는 생각으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언젠가 글로벌 PM 회의가 브라질에서 열렸다. 한국 마케팅 담당자들과 CEO, 본부장까지 모두 브라질에서 2박 3일 회의를 하게 됐다. 평소 친분이 있던 제품 마케팅 차장님이 물었다.
"여기서 이과수 폭포 어떻게 가요?"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어… 저 안 가봐서 몰라요."
눈이 똥그래지셨다.
다음 날 다시 물었다.
"알아보셨어요?"
"아, 내일 회의 끝나고 갈 거예요. 1박하고 와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으로 했어요."
"와, 멋지시네요. 얼마예요?"
"180만 원 정도 하네요."
"헉, 그렇게 비싸요?"
"흠… 비행기 타고 일부러도 보러 가는데, 180이면 진짜 싼 거죠."
사실 이해가 잘 안 갔다. 180만 원이면 아내에게 명품 가방을 하나 사줄 수도 있고, 저축해 두면 수십 년 후에는 꽤 큰돈이 될 터였다.
이런 경험은 꽤 있었다.
프랑스 출장 때 동료들이 주말을 이용해 이웃 나라에 놀러간다며 50만 원씩 걷었다. 안 갔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장 때는 주말에 제품 테스트 겸 피렌체를 다녀오자고 했다.
막내라서 운전할 사람이 필요해서 갔다. 같은 출장에서 스위스 융프라우를 가자고 했다.
또 운전할 사람이 필요하단다. 갔다 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피렌체와 융프라우를 갔다 온 경험이 꽤 크다.
『인디워커』, 『이름보다 브랜딩』 등 7권 이상을 쓴 박승오 작가와 함께 회사 생활을 하던 시절,
그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여행 배낭의 무게는 두려움의 무게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하루 이틀 어디 갈 때도 바리바리 다 싸간다.
이 일, 저 일이 있을 때를 모두 대비해서 간다.
아마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혼자 여행을 가면 이것저것 다 싸 갈 거다.
불확실성이 그렇게 싫고, 집에 있는 걸 다시 사면서 돈 쓰는 게 그렇게 아깝다.
박정민 작가는 책에서 말한다.
"가보시라", "해보시라"고.
지금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참 아깝다.
경험하지 못한 그 시간들이.
생각해 보면, 지나온 삶에서 많은 걸 배운 시간은 '의외성'에 있었다. 모두 계획하고 내 바운더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사건과 시간들보다는, 그렇지 못하고 경험하게 된 시간들 속에서 더 많이 배우게 된다.
그래서 그럴까. 여행을 혼자, 혹은 친구들과 다녀오는 사람들이 이제는 부럽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도전'을, 새로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니 여행을 좋아하는 건지, 여행을 좋아하니 새로운 도전도 잘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필요충분조건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고, 주변 사람들을 보며 "그래, 여행을 해보자!" 막연히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예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다시 할 것 같지는 않다. 내 성향이 사회적 에너지 욕구가 1이라… 강제성이 없으면 안 할 걸 아니까. 다만, 아마도 지금처럼 경험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든 가야 하는 환경을 만들어버렸을 거다. 돈을 먼저 내버린다든가, 약속을 한다든가.
그렇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저질러 버리는 것.
나 혼자 여행보다는 가족과의 여행도 괜찮겠다. 무엇보다 아들들에게는 여행의 참맛을 알게 해주고 싶다.
우리 부서 막내 이야기를 곁들여 본다.
그 친구는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혹은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간다. 속으로는 "어이쿠, 그렇게 해서 언제 돈 모으고, 언제 집 살래"라는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근데 지금 보니, 그 친구는 내 나이 되면 누구보다 부자가 되어 잘 살 것 같다.
결국 경험 부자가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