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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도 실력일까?

능력주의자의 주문

by 북유럽연구소

"축하합니다! 대단하세요!"

누군가의 성취나 성공을 축하하면 곧잘

"다 운이죠. 운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하는 답이 돌아온다. 그럴 때면 난

"운도 실력이죠." 하곤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운도 실력일까?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

많은 경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 세상은 그 노력을 외면하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늪에 빠진 것처럼 어떤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저 사람은 일이 왜 그렇게 안 풀릴까... 조금만 일찍 아님 조금만 늦었어도 됐을 텐데.... 싶은.


성실하게 자신의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주는 것처럼 무언가 상황이 잘 들어맞아 기대이상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많으니, 운도 실력일지 모른다.


하지만 문득 의도적으로라도

"운도 실력"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은 결국

성공은 모두 나의 공이고, 반대로

실패는 오롯이 너의 부족함이라는 뜻으로 읽힐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을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관대한 사회가 된다고 한다. 그렇겠지. 내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나의 성공은 어딘가에 빚진 것이라는 뜻이니. (영어로 재산을 말할 때 fortune을 쓰는 이유라고.)


만약 모든 게 내가 열심히 해서 일군 것이고

운 마저도 내 실력이라고 여긴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합당할 뿐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처럼 여겨질 것이다. 반면 누군가의 불행은 그 사람이 노력하지 않아서 다 그럴만하니까 그렇겠지... 하며 긍휼히 여길 이유가 사라진다. 능력주의자에게는 현재의 결과가 다 인과응보니까.


어느 날 교회에서 본 플랑카드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Our promotion is our testimony."

"우리가 잘 되는 것이 우리의 간증"

이 말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해도 되는 말일까?


성경에 소위 잘 된 사람들,

사람들의 기도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에스더처럼 되게 해 달라... 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축복을 받아서 그 자리에 올라갔나? 그 자리에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했나?


노예로 팔려가고, 식민지에서 지배국의 포로로 끌려가고, 자신의 태생을 숨긴 채 무서운 왕과 결혼해 왕비가 되고... 다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에 앞서 출구가 없어 보이는 고난의 시간을 견뎠다.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도 신앙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성경 구절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가 겪는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어떤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그 자리에 올랐으며, 다들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오히려 성경에서 복을 받았다고 언급된 사람들 - 정작 누구도 욥처럼, 룻처럼, 라합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만큼 그들의 삶은 세상의 관점에서 고생스러웠다.


욥 - 온 가족과 재산, 건강을 잃고도 믿음을 지킴
룻 - 일찍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함께 남의 도움에 기대어 생활
라합 - 이방인이자 기생, 이스라엘군을 도운 공로로 예수의 족보에 오름

...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번영은

성경이 또는 신이 말하는 축복과는 다른 개념이 아닌가?


신앙인이라면 나의 삶을 통해, 특히나 고난으로 여겨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역사 안에서(만약 역사가 너무 거창하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는 것, 많은 이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최선 아닐까.


누구처럼 되게 해 달라, 무엇이 되게 해 달라가 아닌

내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그것이 누구나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자리든 아니든

내 그릇에 맞게 주어진 역할로 알고

그저 나의 쓰임새에 맞게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그러니 운은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주문이고

우리의 잘됨도 잘 안됨도

역사의 수레바퀴 속 훈련의 과정 정도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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