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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슌 Nov 08. 2016

Lake Breeze

바릴로체-1

  칼라파테를 떠난 지 32시간째, 바릴로체 행 까마 버스는 엘 볼손El Bolson에 멈췄다.

 

 왼쪽이어야 한다, 오른쪽이어야 한다, 아르헨티나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루타40의 절경때문에 버스비용이 20만원을 호가하는 이 구간을 나는 콜라 세 병이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야 막 한국에 선을 보인 침대형 버스가 기본 옵션인 남미여행이었지만, 아무리 까마좌석이라도 밤이 편하지 않았고,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위스키도 반갑지 않았다. 버스는 칼라파테를 출발해 바릴로체가 있는 북으로 향하지 않고 동남에 있는 리오 가예고스Rio Gallegos를 거쳐 3번 도로를 따라 코모도로 리바다비아Comodoro Rivadavia로 향했다. 드라마 시청이 지루해질 즈음 GPS를 켜보니 코모도로 리바다리아를 지나 루타40을 향해 26번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현 위치를 알리는 빨간 점이 지도 속 엘 볼손El Bolson글자 위를 깜빡이고 있었다. 휴대폰 시계는 곧 23:00을 나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2층 왼쪽 좌석 창 측에 있던 나는 기사가 버스를 멈추고 내려 길 건너편 상점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출입문도, 전면도 전부 유리창으로 돼있던 그 상점을 버스 유리창을 넘어 들여다보았다. 기사는 점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림, 기사의 손에는 상점 안 벽면에서 회전하던 전기통닭구이가 들렸다. 바람을 쐬겠다던 남자친구가 내려간 지 얼마 안돼 올라와선 버스문이 잠겨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바릴로체까지 남은 건 고작 한 시간 거리, 우리는 버스에 갇혔고, 기사는 통닭을 들고 둥근 몸으로 뛰어왔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 애견샾의 어린 강아지들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각, 버스가 바릴로체 터미널에 들어섰다. 가족들이 마중을 나온 현지인들은 따뜻한 포옹과 함께 재빠르게 터미널을 떠났다. 배낭을 들쳐 멘 또 다른 커플과 우리 둘만이 텅 빈 택시정거장을 서성였다. 시내버스가 다닐 시각은 아니고, 그렇다고 5km를 걸어갈 수는 없었다. 보조배낭 옆에 꽂혀있던 와인병을 꺼내 들이켰다. 그때 한 대의 택시가 나타났고, 내 몸뚱이 만한 배낭을 뒷좌석에 밀어 넣던 그들에게 동승할 수 있는지 물을 새도 없이 택시는 떠났다. 배낭을 내려놓고 또다시 병나발을 불었다. 소매치기에 유난히 경계가 심한 남자친구의 눈총을 받으며 다시 배낭을 들쳐멨다. 그때 시내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왔다. 머릿속으로 '시내에 가냐고 어떻게 묻지?'라고 생각하던 순간에 버스 뒤를 따라 택시가 한 대 들어왔다. 트렁크를 여는 택시기사에게 흥정할 힘도 없이 금액도 묻지 않은 채로 배낭을 건네줬다. 그날 밤, 급하게 들어간 스테이크 가게에서 와인 두 병을 더 마시고 나는 피곤을 견디지 못해 졸린 아기처럼 엉엉 울며 우리때문에 폐점도 못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남자친구를 곤란하게 했다.


el escenario @San Carlos de Bariloche, Argentina


  바릴로체는 내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기 싫었다는 말은 아니다. 호수바람이 놀랍게 불던 도시였다. 이격이 생긴 것이 내 눈인지 마음인지, 조리개를 아무리 돌려보아도 뷰파인더 속 바릴로체가 선명하지 않았다. 바릴로체에서 카메라 테스트 겸 남미를 담은 첫 번째 현상을 했고, 그것이 내가 바릴로체를 지나가는 도시임에도 깊게 기억하는 까닭이다. 바릴로체에서의 사흘 째 날, 급하게 촬영한 필름 한 롤을 들고 'Kodak'이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찾아 들어갔다. 자꾸만 인화된 사진을 보여주는 할아버지에게 "콤퓨타도르Computador! 콤퓨타도르!"하고 외치자 그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에 18이라 적고 밑줄을 긋더니 "마냐나Mañana."라던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Mañana는 '아침'인데, 18시는 저녁이니까, 가격이 18페소인가? 18페소면 1500원? 엄청 저렴하네..' 생각하며 지갑을 뒤적이자 할아버지는 또다시 "Mañana."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나는 여행 3주 차가 되어서야 '내일'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내일은 콜로니아 스위자Colonia Suiza에서 푸드 페스티벌이 열릴 거야.


  호스텔 직원이 새로운 방 키를 건네주며 말했다. 기대도 않았던 바릴로체에서 신나는 일이 생겼다.


* 콜로니아 스위자Colonia Suiza : 스위스 이주민 마을로 1899년 첫 이주민이 정착을 시작했고, 현재 1937년에 개교한 학교 등 당시 건물들이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 끝자락에서 버스를 타고 30여분, 직원이 지도에 표시해 준 위치에 내려 회전교차로를 건넜다. 텅 빈 길가에 사람들이 서있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버스가 오리란 생각도 못할만한 버스정류장이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매를 데리고 온 부부 옆으로 내 몸집만 한 셰퍼드가 지나왔다. 곁에 다가와 코로 내 다리를 부비던 그가 예뻐 몸을 쓰다듬으니 기다림에 얼었던 손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그는 버스를 기다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귀여움 받는 척 온기를 나눠주고 떠났다.


  곧 도착한 버스를 타고 수풀을 구비구비 돌아 콜로니아 스위자에 도착했다. 표지판이 있었다 해도 미쳐 챙겨 보지 못할 날씨여서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들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쇠창살로 가로막힌 안쪽에선 젊은 여자가 삽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흙을 퍼 나르자 이파리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파리를 걷어내니 그 안에 소세지와 감자, 돼지고기 등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이거 먹자! 먹어보고 싶어!"라는 내 말에 눈치 빠른 남자친구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사람들이 티켓같은 것을 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부스로 달려가 쿠란토 티켓에 내 이름을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켓부스가 문을 닫고 남자친구의 센스로 얻은 정통 꾸란또Curanto에 내 차례가 왔다. "Stella!" "Sí!" 남자친구는 나를 자리에 앉혀놓고는 꾸란또가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무심하게 식어갈 무렵 맥주 두 잔을 들고 나타났다.

  


* 꾸란또Curanto : '뜨거운 돌'이란 뜻으로, 보통 칠레에서는 생선, 조개, 닭, 양, 소, 감자를 넣고 끓인 탕류를 일컫는데, 전통적으로 나뭇잎으로 둘러싼 땅구멍에 그 위에 장작을 피워 오랫동안 익힌 음식을 말한다.


Curanto Victor Goye @Colonia Suiza, Bariloche, Argentina


   조금 늦은 시간이었던 탓인지 문을 닫은 점포가 꽤 있었지만, 피자와 사과케이크도 맛보고, 볼리비아에나 가야 볼 법한 뜨개용품 점포에 들려 커플 발토시도 구입해 그 자리에서 바로 신고 추위를 달랬다. 마을 자체가 상업적으로 변모한 기색이 없지 않았지만, 방송에서나 본 적이 있는 '달군 흙 요리'를 우연찮게 실제로 보고 맛도 볼 수 있어 꽤나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the sweetest cake @Colonia Suiza,Bariloche, Argentina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쨈이 듬뿍 올라간 달디 단 사과케이크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평소 달고 찬 음료만 찾는 남자친구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 케이크를 손시려하며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계속 먹을 것이냐 물으며 버리고 오겠다고 한다. 스스로 단 것에 취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맛보고 싶어 남자친구를 졸라 산 케이크를 무책임하게 버리고 싶지 않아 억지로 한 입, 두 입, 욱여넣고 있었다. 버스가 계속해서 오지 않고 결국 길어지는 추위에 나는 반이나 남은 케이크를 포기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내가 먹은 단 케이크 중 가장 맛있다고 기억할 것이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아하니 도착하는 버스에 모두 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버스가 자주 오다니는 곳이 아니긴 했지만 정상운행 상태는 아닌지 버스가 많이 늦었다. 우리 뒤에 서있던 가족의 엄마가 들고 있는 빵 냄새를 맡고 개 한 마리가 다가왔다. 옆에선 어린 아들이 작게 난 시내에 돌을 던지고 있었는데, 개가 그걸 음식으로 알았는지 달려가 돌이 던져진 곳에 코를 박았다. 추운 날씨에 시내에 몸을 적셔가며 음식을 좇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데, 어린 아들의 재미를 위해서였을까, 이번에는 그의 아빠가 시내에 돌을 던졌다. 사람들이 치는 장난에 개는 배고픔을 달래보고자 계속해서 찬 물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던져진 돌에 반응하는 개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다른 가족의 어린 아들도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돌이 시냇가를 향하는지 개를 향하는지 모르겠어 저지를 하려는데, 그때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실어날라야 했던 버스에서 우린 서있었지만 중심을 잡을 필요도 없이 서로에게 둘러싸인 채로 콜로니아 스위자를 벗어났다. 


the day @San Carlos de Bariloche, Argentina


  썩 좋지 않은 날씨에 바람만 씽씽부는 바릴로체의 저녁, 콜로니아 스위자로 향하던 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던 곳을 기억해내곤 "내일은 그리로 가보자."라며 호스텔로 오르는 언덕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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