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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윤 May 09. 2017

기대지마.

푸에르토 몬트

  바릴로체를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로 들어가던 국경에 비가 내렸다. 안데스 산맥 위 국경 치고 겨울의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았다. 옅은 입김을 내뱉으며 출입국관리건물로 들어갔다. 동양인이 우리뿐이었다. 주의사항이 있는지 관리복을 입은 여자가 연설 수준의 설명을 했지만, 영어 버전은 이어지지 않았다. 스페인어 비사용자가 우리뿐이었나보다.


  창밖으로는 버스 앞에 판자를 널어놓고 트렁크에서 꺼낸 배낭들을 뉘어놓고 있었다. 줄지어 출국심사를 하는 동안 창가에 내려놓은 핸드백, 보조가방 등을 훑던 탐지견이 가방들을 지나다 말고 짖는다. 사과가 나왔다. 여자는 사과를 들어 보이며 또 연설을 한다. 그제야 칠레는 입국 시 과일, 야채류 반입에 꽤 까다롭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밖에 누워있는 내 배낭이 걱정됐다. 몇 개 인지 모르겠지만, 매일 주식으로 사용하는 양파와 감자가 들어있었다. 여차하면 꺼내 버릴 요량으로 가장 앞에 서서 탐색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가 지나간 가방은 다시 하나둘씩 버스 트렁크에 실렸다. 탐지견이 내 가방을 지났다. 그리고 옆옆에 있던 가방에서 멈추더니,


멍!

  남자친구의 배낭이었다. 우리가 가방 앞에 서자 무척 어려보이는 여자 관리직원 두 명이 가방을 열어봐도 되는지 손짓한다. 비내리는 국경 축축한 판자 위에 남자친구의 옷가지가 널리고 배낭이 굴렀다. 배낭에서 나온 것 중 야채나 과일은 없었다. 직원들이 신라면을 들고 의아해했다. '코리안 누들'이라고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한다. 영어를 못해서 설명을 안해준 것이었구나. 멀찍이서 탐지견을 캐리어에 들이고 돌아오던 소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라면봉지를 보더니 통과시켜준다. 아침마다 시간은 걸려 정리해야 되는 65L 배낭을 전부 풀어헤쳐놨으니, 남자친구는 급한 마음에 마구잡이로 넣느라 공간이 부족하다. 이미 모든 수속을 마친 탑승객들이 1,2층 창문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쑤셔 넣다 못해 튀어나온 옷가지는 배낭 커버로 마무리를 한다. 그렇게 우린 칠레에 들어섰다.


the clammy cold @Puerto Montt, Chile

  푸에르토 몬트에도 비가 내렸나 싶었다. 시내가 비렸다. 날이 흐리고 추웠다. 남자친구가 피곤해해서 내가 고대하던 앙헬모 수산시장은 다음날 가자며 집 앞 슈퍼에서 콜라와 물, 과자 한 봉지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파타고니아를 떠난 이후로 숙소에서 느끼는 추위가 극심했다. 눈이 내리고 영하를 내리지르는 파타고니아에서는 과도한 난방시설 때문에 되려 추위를 못 느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따뜻해지는 날씨만큼 난방시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으슬거리는 몸을 침낭에 넣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Margouya Patagonia @Puerto Varas, Chile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나 앙헬모 수산시장으로 향했다. 비수기에는 여행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 곳이다. 폐쇄된 듯한 분위기의 시장 뒤편에서는 시장에서 남는 해산물을 사료처럼 받아먹는 물개들이 수두룩했다. 듀공보다도 더 퉁퉁할 듯한 물개들이 서로 연어를 차지하겠다며 괴성을 질렀다. 그런 물개와 셀카를 찍겠다며 팔을 뻗은 남자친구를 멀찍이서 한참 쳐다보다가 이내 추워 가자고 징징댔다. 다정하게 '오빠 저기 서봐.' 한마디 하고, 손가락 두 번만 눌렀으면 활짝 웃었을 남자친구에게 이제 와서 괜스레 미안하다. 내 성화에 이기지 못해 그곳을 빠져나와 호객을 하던 여자를 따라 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삼겹살을 제외하곤 음식에 특별한 기호를 보이지 않는 남자친구는 언제나처럼 내 선택을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내려다봤지만 메뉴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축축한 추위였다. 괜한 찝찝함에 테이블로부터 최대한 멀리, 의자 끝자락에 엉덩이만 걸친 채 울먹거리는 눈으로 남자친구를 넘어 다른 테이블을 훑었다. 내 시선이 닿은 테이블에 한 젊은이가 내 시선에 "이거 꽤 괜찮아."라며 조개탕을 추천했다. 


  메뉴를 전해 들은 직원이 세척이란 되어본 적이 없는 듯한 냄비를 꺼내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려다 창가에 놓인 성모마리아 액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액자를 등반하는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난 더 이상 엉덩이만 걸쳐 앉아 있기도 힘들어졌다. "오빠 바퀴벌레야.."라고 말했는데, "응, 뒤로 기대지마."라는 답변이 들렸다. 온몸에 털을 세우고 어디에 있냐고 묻는 내 질문에 남자친구는 눈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했다. 대체 몇 마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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