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
남미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서로 묻고 답한다.
"우수아이아 가보셨어요?" "어때요?"
"여권에 도장 찍으러 갔는데 딱히 볼 것이 없어요, 그래도 꼭 한 번은 가야만 하죠."
내가 남미에 가자고 했을 때, 남자친구는 대뜸 여권에 도장을 몇 개나 찍을 수 있는지 물었다. 6년간 일만 하던 남자가 역마살 제대로 낀 여자를 만나 이제는 여행을 하면서 다음 여행을 꿈꾸는 남자가 되었다. 유럽에 가고 싶다던 남자친구를 남미에 데려가기 위해 나는 여행을 준비하며 출입국 도장 외에 마추픽추와 같은 특별장소에 준비된 도장들을 합해 남미여행동안 총 몇 개의 도장을 수집할 수 있는지 세어봐야 했다. 남미여행 중에 혹여 사증 페이지가 모자랄까 이미 도장이 들어찬 페이지 빈틈을 찾아 우수아이아의 도장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5월 말의 파타고니아는 우중충하기만 했다. 하루빨리 도장숙제를 마치고 더 추워지기 전에 칼라파테로 가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숨도 못 쉬고 달린 일주일에 남자친구가 나를 만난 이후로 처음 감기에 걸렸다. 우리는 싸웠고, 토라졌다. 치안을 핑계로 빨리 숙소로 돌아가자는 남자친구에게 기념품점에 들려 엽서를 사고 가자며 생떼를 써 그의 발걸음을 돌렸다. 반년 전 작지 않은 수술로 회복 중에 있는 남자친구가 그 일주일을 버텨준 것이 되려 고마운 일이라는 걸 생각도 않고, 또다시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내일에 '세상의 끝'의 밤을 묻고 말없이 잠들었다.
말없이 잠든 밤이 말없는 아침이 되었다. 일찍 일어났지만, 세상의 끝은 아직 어둑했다. 내 욕심만 부려 강행한 일주일에 대한 사과로 남자친구에게 따뜻한 홍삼차를 한 잔 타 줬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촉박한 시간을 쪼개 가족과 친구들에게 쓴 엽서를 부치고 나오며, 칼라파테까지만 가면 그 이후로는 여유로워질 거라며 지친 그를 말로 안심시키려 했다.
수속 카운터가 서너 개뿐인 이층짜리 공항은 정말 아담하고 예뻤다. 여권을 내밀자 스페인어로 목적지를 묻기에 칼라파테El Calafate로 향한다고 했더니,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언급하며 괜찮겠냐고 한다. 영어를 할 수 있냐 물으니, 내게 말끝마다 'lady'라며 칼라파테의 날씨 상황이 좋지 않아 칼라파테에서 착륙을 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다시 우리가 지나온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비행을 해야 한다고 했다. 딱히 선택권이 없던 상황이라 얼떨결에 도박성 발권을 했다.
Closed
결국 두 시간이나 지연된 항공편 상태가 갑자기 바뀌었다. 'canceled'도 아니고 'closed'라니. 공항 내 라운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함께 우르르 몰려가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도, 답변도 스페인어로 오가는 상황에 눈알만 굴리며 서있자 유럽 어디선가 온 듯한 아저씨가 서툰 영어로 비행기가 취소된 것인지 물었다. "우리도 몰라요, 기다려보세요."라는 항공사 직원의 답변에 아저씨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지, 연결된 항공편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항공사 직원은 어느새 사라졌다.
남자친구가 감기기운 위에 위스키를 한 잔 더 얹을 즈음,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보니 이제야 비행이 결항되었다고 표시되었다. 가방을 챙겨 다시 카운터로 가 항공사에서 주는 숙박업체 리스트를 받아 들었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 동안 아저씨와 그의 가족이 독일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딸이 유창한 영어로 내게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대. 왜냐하면 이건 '기. 상. 악. 화'때문이라서."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날씨의 문제로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는 것은 항공사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우수아이아의 숙박비는 그녀를 화나게 할 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자들이 추천했지만 가격이 썩 합리적이지 못해 포기했던 숙소에 전화를 걸어 방이 있는지 물었다. 항공사 직원이 친절하게도 옵션별 가격을 적어 주며 숙소로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전날 지낸 숙소의 두배 정도 되는 가격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남자친구를 쉬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검푸른 초저녁 하늘에 어울리는 노란색 숙소였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 순간 도미토리를 잡을까 했지만 남자친구의 지친 몸이 눈에 보였다. "프라이빗룸으로 줘요, 화장실은 공용으로." 그러자 카운터에 있던 여자가 물었다. "너희 비행기 취소돼서 왔지? 그럼 이틀 지낼거지?" 항공사 직원이 내일 같은 시간에 오면 된다고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니, 그녀가 우리랑 같은 상황의 여행자가 있는데 방금 체크인하며 이틀 후 같은 시간에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인터넷부터 연결해 메일함을 열어봤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도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확실치 않은 상황에 무턱대고 이틀이나 결제할 수 없어 우선 확인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하루만 묵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남자친구의 침대를 라디에이터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아침 일찍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위스키 덕인지 한결 나아 보이는 남자친구가 삼각대를 챙기고 있었다. 달이 지기 전에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패딩 점퍼를 대충 걸치고 눈을 비비며 카메라만 챙겨 바닷가로 나갔다. 이틀을 이어온 침묵이 무색하게도, 남자친구는 차가운 바람에 내가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패딩모자를 씌워 잠가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누군가 세상의 끝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자물쇠가 매달린 곳 앞에 섰다. 달이 비치는 바닷가에 물개 두 마리가 서성였다. "오빠, 물개야!"하고 돌아보니 삼각대를 설치하고 있는 남자친구가 보였다. 그 바다 앞에서 여행 중 처음으로 제대로 함께인 모습을 담았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원했던 여행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