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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Mar 12. 2024

택배분류알바의 제일 큰 장점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

택배분류알바의 제일 큰 장점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이 부끄럽다는 것X, 내 인생에 대한 부끄러움!)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퇴사하고 4년을 보내고 직면한 내 모습은, 본업으로 생활비조차 못 버는 가난한 프리랜서. 게으름과 무기력으로 일은커녕 일상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이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신과에 가고, 택배알바도 시작했다.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는 좋아하는 일로 먹기 살기 위한 과정이자 한 어른이자 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고 싶은 내 삶의 여정기.




택배알바를 하게 된 건,

집에서 가까워서였다. 걸어서 금방 갈 수 있고, 알바 시간만 딱 집중하면 되고, 오전만 하는 거라 내 본업에 방해되지 않고, 아침에 시작하는 거라 일찍 일어나는 루틴을 잡는 데에도 도움 되고! 이래저래 나에게 딱 알맞았다.



택배알바를 하게 된 건,

교회에서 그 당시 내 삶을 아주 적나라하게(!) 나눔을 하다가 '수지야, 너 알바를 하는 게 좋겠다'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사실 그동안 일을 하는 게 어떻냐는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못한다고 말을 했었다. 나는 에너지가 없어서 알바를 하면, 알바만 하고 내내 집에서 쉬기만 할 게 뻔해서.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떤 반전도 노릴 수 없는 희망 없는 인생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알바하란 말에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더 이상은 내 의지와 힘만으로는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항복이기도 했다. 하나님과 공동체를 믿고 내가 그동안 고집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환경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



택배알바를 하게 된 건,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일을 했다 말았다 불성실하게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이자, 작은 일이라도 꾸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단 깨달음을 내 삶에 체화시키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바라는 성취와 성공의 시점이 늦어질수록 그럴싸하고 멋진 일만 해서 빨리 삶의 반전을 이루고 싶은 허영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간 마음도 몸도 조금 단단해져서 알바를 해도 내 일을 지켜나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게 나의 허세다. 입이 길다.)



택배알바를 하게 된 건,

돈 때문이었다. 내가 일하는 택배지점은 5명의 택배기사님들이 있는데 팀장님 빼고는 다 나보다 어리다! (유난히 어린 친구들이 많은 곳인 듯) 그중 한 친구가 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누나는 이 일을 왜 해요?"물은 적이 있었다. "돈 벌려고 하지."하고 말했었다. 그래 사실 이게 맞지. 앞서 말한 이유와 맥락이 구구절절해도, 가장 짧게 말하면 '돈'이다. 사실 조금이라도 먹고 살만 할 때의 나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했다.

그런 내가 알바를 한다는 건, 결국 먹고살 돈이 없다는 거지. 별 대단스럽게 이유를 붙이는 것도 웃기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만 고집하다가, 끝에 몰려서야 일할 생각을 한다는 게 참 철부지 같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일할 마음을 먹어도 딱히 일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분명 여러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바를 구하려고 보니 뭘 해본 경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렇더라. 그래서 하는 게 택배분류알바다. 하는 일을 하냐면, 택배영업소에 물건들이 오면 레일에 부어져서 내려오는데, 그중에 우리 영업소의 물건들을 골라내서 기사님들 자리에 차곡차곡 쌓는 일이다. 번호를 잘 보고, 물건을 챙기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다.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이 일을 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어떤 의미냐면,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려면 하게 된 과정과 현재의 삶 속에 내 부끄러운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렇다. 서른이 훌쩍 넘었으면서, 그간 삶에 책임감 없이 살았던 것,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능력도 별로 없다는 것. 부끄럽다. 근데 요즘엔 부끄러울수록 더 열심히 내 상황을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닌다. 온데만데. 나는 이러고 살아가고 있다고. 


뭐랄까. 뒤늦게 느끼는 삶의 부끄러움이,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더 느끼고 깨우쳤어야 부끄러움을 그간 잘 살고 있는 척, 괜찮은 척하며 회피하고 미뤄왔었다. 이제는 잘 살고 있는 척, 괜찮은 것들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더 이상은 내 삶에 미루거나 회피하는 일과 감정도 만들거나 남기고 싶지 않다. 내가 여태껏 잘못 살아온 부분들을, 그래서 겪어야 할 감정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 그래서 겪어야 할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것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짜 넘겨야 할 것은 넘기고 변할 것은 변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할 수 있으니까.


이 과정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드디어 남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나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해졌구나.

겉만 번지르르하고 변화 없는 하루보다

비루해도 어제보다 나아진 하루가 소중해졌구나.


드디어

체면보다 삶을 더 사랑하게 됐구나!


⠀⠀


작가소개ㅣ시샘

낮에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테라피스트

아침에는 택배를 분류하는 생존형알바생

그림책이 너무 좋아서 집방구석에 그림책방을 만들고,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히는 그림책테라피스트가 되었다. tvN과 KBS 방송 출연도 하고, 여러 매거진에도 소개되며 금방 성공할 줄 알았으나, 현재 택배분류 알바를 병행하고 있다. 꿈은 유퀴즈 나가서 어른들한테 그림책 영업하기!


시샘의 인스타그램 @poetry_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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