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분류알바를 하면서 경험하는 뜻밖의 힐링포인트가 있다.
그건 아주 사소하게 도와주고 도움받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는 것. 매일 '감사합니다'하고 말해야 할 날이 많다. 집에서 하루종일 혼자 못한 일만 세면서 매일 '오늘도 못했네, 또 못했네'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퇴사하고 4년을 보내고 직면한 내 모습은, 본업으로 생활비조차 못 버는 가난한 프리랜서. 게으름과 무기력으로 일은 커녕 일상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이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신과에 가고, 택배알바도 시작했다.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는 좋아하는 일로 먹기 살기 위한 과정이자 한 어른이자 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고 싶은 내 삶의 여정기.
처음 알바하러 간 날,
팀장님이 나에게 했던 첫 말이 "무거운 걸 들어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였다. 면접도 없이 알바 당일 처음 얼굴을 봤는데, 팀장님이 보기에 나는 힘이 있을까 싶은 조그마한 여자였을 것 같다. 그 말에 '잘 모르겠어요"하고 대답했었다. 몸으로 일도 운동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내 몸이 가진 힘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거라곤 손목에 힘이 없어서 걸레를 짤 때 겹쳐서 짜지 못하고, 한 겹으로 찔끔찔끔 짰던 것. 분류알바는 물건을 옮기는 거니까 손목의 힘은 상관이 없으려나. 그래도 가끔 집구조를 바꿀 때는 눈에 광안이 돌면서 초인적인 힘으로 책상도 소파도 번쩍번쩍 옮겼었다. (사실 낑낑 옮겼다) 이럴 때 말고는 대부분을 누워 지냈으니, 나도 내 몸의 가능성을 몰라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어차피 레일에서 물건을 들어 바로 등 뒤쪽에 물건을 쌓으면 되는 거라 순간적으로 물건을 들 수 있으면 되는 건데, 요즘 보니까 10kg짜리는 잘 들더라. 가끔 20kg짜리가 오면 들 수는 있는데, 무거워서 바닥에 내려놓고 쭈욱 밀어서 옮긴다.
그런데 사실 무거운 물건은 별로 들 일이 없는 게,
기사님들이 무거운 건 알아서 많이 들어주시고 도와주신다.
내가 일하는 곳은 택배들이 중간 허브를 지나 지점으로 나눠지는 터미널이다. 터미널에서는 각 지점의 기사님들이 레일에 순서대로 서서 배달할 물건을 챙긴다. 대부분 물건 받는 일(속칭은 까대기)도 택배기사님이 직접 하시고 몇몇 곳만 나 같은 알바를 쓴다. 내가 있는 자리 쪽은 나만 알바생이고 나머지는 다 기사님이시다.
일 할 때, 앞쪽 기사님이 3번 물건을 챙기면 나는 4번 물건 그리고 뒤쪽 기사님은 5번 물건을 챙기는 식. 그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물건을 챙기다가, 무거운 물건이 오거나 일이 바쁠 때는 앞쪽 기사님이 내 물건을 먼저 챙겨서 쌓아주신다. 그러면 '감사합니다' 말한다. 바쁘거나 무거워서 물건을 놓때면 5번 기사님이 내 물건을 챙겨서 쌓아주신다. 그러면 또 '감사합니다' 말한다. 사실 4번 레일에 오는 물건도 다 내가 챙길 것 같지만, 기사님들이 모두 배달하러 나가는 2시간 정도를 빼면 나머지 시간에는 우리 지점 기사님들이 레일 앞에 서서 자기 물건을 알아서 챙겨가신다. 특히 큰 짐들은 더더욱. 그래서 힘들 때가 많지는 않다. '감사합니다' 할 일만 많지.
근데 나만 도와주는 게 아니라 기사님들이 서로서로 잘 도와주신다. 잠시 자리를 비울 때나 한쪽에 받을 짐이 많을 때 자기 일이 아니어도 다들 대신 들어주고 챙겨주고. 뒷사람이 물건 편하게 받을 수 있게 상자를 돌려놓거나 당겨놓고.
레일 위의 다정함이랄까.
안 해도 되지만 해주면 편한 사소한 배려들이
레일 위에서 무수하게 일어난다.
기사님들은 인식도 못하고 그냥 하는,
호흡 같은 배려를 받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일할 때 도움을 많이 받으니, 나도 매번 '도움이 돼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떻게 물건을 놔야 기사님들이 편하실까, 어떻게 쌓아야 잘 쌓는 거지' 생각하며 물건을 정리한다. 번호가 쓰여있지 않아서 주소를 보고 구분해야 하는 물건들이 있는데, 물어보지 않고 구분하기 위해 주소도 열심히 익히고. 그렇게 우리 지점의 물건이 익숙해진 뒤에는 양 옆 레일에서 기사님들이 챙기는 물건들을 살펴봤다. 그래서 내 물건을 챙겨주셨던 양쪽의 기사님들처럼, 3번 레일에서 미처 못 챙기고 흘러 내려오는 물건을 나도 챙겨드리고, 5번으로 가는 물건은 챙기기 좋게 레일 가까이로 당겨놓는다. 기사님들을 보면 물건을 들고 내려놓느라 하루에도 수없이 여러 번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신다. 그게 되게 힘든 일이라 '어떻게 하면 기사님들이 허리를 덜 굽히지?' 생각하면서 물건을 드린다. 차에 물건을 가져다 놓거나, 직접 주거나 하면서. 사실 이렇게 생각하고 해 봤자, 일에 큰 차이가 있진 않다. 이러나저러나 그냥 물건 찾아서 쌓고 정리하는 일일 뿐이어서(!)
그런데 하루에 작은 순간이라도
누군가한테 도움 될 궁리를 한다는 게
생각보다 기분 좋고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더라.
사소한 도움을 받고 또 주고.
매일 고마운 일이 생기고, '고맙다' 말을 듣는 것.
이것은 일종의 택배알바 테라피(!)랄까.
몇 개월간 이 경험이 내 삶에 은은하게 힘이 됐다.
어쩌면.. 그림택테라피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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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ㅣ시샘
낮에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테라피스트
아침에는 택배를 분류하는 생존형알바생
그림책이 너무 좋아서 집방구석에 그림책방을 만들고,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히는 그림책테라피스트가 되었다. tvN과 KBS 방송 출연도 하고, 여러 매거진에도 소개되며 금방 성공할 줄 알았으나, 현재 택배분류 알바를 병행하고 있다. 꿈은 유퀴즈 나가서 어른들한테 그림책 영업하기!
시샘의 인스타그램 @poetry_p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