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분류알바의 제일 큰 장점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이 부끄럽다는 것X, 내 인생에 대한 부끄러움!)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퇴사하고 4년을 보내고 직면한 내 모습은, 본업으로 생활비조차 못 버는 가난한 프리랜서. 게으름과 무기력으로 일은커녕 일상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이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신과에 가고, 택배알바도 시작했다.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는 좋아하는 일로 먹기 살기 위한 과정이자 한 어른이자 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고 싶은 내 삶의 여정기.
집에서 가까워서였다. 걸어서 금방 갈 수 있고, 알바 시간만 딱 집중하면 되고, 오전만 하는 거라 내 본업에 방해되지 않고, 아침에 시작하는 거라 일찍 일어나는 루틴을 잡는 데에도 도움 되고! 이래저래 나에게 딱 알맞았다.
교회에서 그 당시 내 삶을 아주 적나라하게(!) 나눔을 하다가 '수지야, 너 알바를 하는 게 좋겠다'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사실 그동안 일을 하는 게 어떻냐는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못한다고 말을 했었다. 나는 에너지가 없어서 알바를 하면, 알바만 하고 내내 집에서 쉬기만 할 게 뻔해서.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떤 반전도 노릴 수 없는 희망 없는 인생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알바하란 말에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더 이상은 내 의지와 힘만으로는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항복이기도 했다. 하나님과 공동체를 믿고 내가 그동안 고집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환경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일을 했다 말았다 불성실하게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이자, 작은 일이라도 꾸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단 깨달음을 내 삶에 체화시키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바라는 성취와 성공의 시점이 늦어질수록 그럴싸하고 멋진 일만 해서 빨리 삶의 반전을 이루고 싶은 허영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간 마음도 몸도 조금 단단해져서 알바를 해도 내 일을 지켜나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게 나의 허세다. 입이 길다.)
돈 때문이었다. 내가 일하는 택배지점은 5명의 택배기사님들이 있는데 팀장님 빼고는 다 나보다 어리다! (유난히 어린 친구들이 많은 곳인 듯) 그중 한 친구가 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누나는 이 일을 왜 해요?"물은 적이 있었다. "돈 벌려고 하지."하고 말했었다. 그래 사실 이게 맞지. 앞서 말한 이유와 맥락이 구구절절해도, 가장 짧게 말하면 '돈'이다. 사실 조금이라도 먹고 살만 할 때의 나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했다.
그런 내가 알바를 한다는 건, 결국 먹고살 돈이 없다는 거지. 별 대단스럽게 이유를 붙이는 것도 웃기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만 고집하다가, 끝에 몰려서야 일할 생각을 한다는 게 참 철부지 같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일할 마음을 먹어도 딱히 일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분명 여러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바를 구하려고 보니 뭘 해본 경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렇더라. 그래서 하는 게 택배분류알바다. 하는 일을 하냐면, 택배영업소에 물건들이 오면 레일에 부어져서 내려오는데, 그중에 우리 영업소의 물건들을 골라내서 기사님들 자리에 차곡차곡 쌓는 일이다. 번호를 잘 보고, 물건을 챙기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다.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려면 하게 된 과정과 현재의 삶 속에 내 부끄러운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렇다. 서른이 훌쩍 넘었으면서, 그간 삶에 책임감 없이 살았던 것,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능력도 별로 없다는 것. 부끄럽다. 근데 요즘엔 부끄러울수록 더 열심히 내 상황을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닌다. 온데만데. 나는 이러고 살아가고 있다고.
뭐랄까. 뒤늦게 느끼는 삶의 부끄러움이,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더 느끼고 깨우쳤어야 부끄러움을 그간 잘 살고 있는 척, 괜찮은 척하며 회피하고 미뤄왔었다. 이제는 잘 살고 있는 척, 괜찮은 것들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더 이상은 내 삶에 미루거나 회피하는 일과 감정도 만들거나 남기고 싶지 않다. 내가 여태껏 잘못 살아온 부분들을, 그래서 겪어야 할 감정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 그래서 겪어야 할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것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짜 넘겨야 할 것은 넘기고 변할 것은 변하고 사랑할 것은 사랑할 수 있으니까.
이 과정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드디어 남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나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해졌구나.
겉만 번지르르하고 변화 없는 하루보다
비루해도 어제보다 나아진 하루가 소중해졌구나.
드디어
체면보다 삶을 더 사랑하게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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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ㅣ시샘
낮에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테라피스트
아침에는 택배를 분류하는 생존형알바생
그림책이 너무 좋아서 집방구석에 그림책방을 만들고,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히는 그림책테라피스트가 되었다. tvN과 KBS 방송 출연도 하고, 여러 매거진에도 소개되며 금방 성공할 줄 알았으나, 현재 택배분류 알바를 병행하고 있다. 꿈은 유퀴즈 나가서 어른들한테 그림책 영업하기!
시샘의 인스타그램 @poetry_p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