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편리 Mar 30. 2021

코로나 시국에 급성폐렴이라니 9(마지막)

인생 3막

 막무가내로 놀고 먹다 보니 어느덧 한 해가 저문 새해의 3월이었다. 맘 놓고 쉴 법도 한 긴 시간이었건만 왜 틈만 나면 위통이 찾아오나 했더니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나의 이 연재 때문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쓰겠다고 아무도 재촉 않는 글들에 부담을 가졌는지...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만 더 지나면 아팠던 지도 1년이 다 되어가는 판국에, 급성폐렴이 뭐 그리 큰일날 뻔 한 일이냐며 스스로 심드렁해진 탓이 내 게으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또 겪기 싫은 고통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타임머신을 타 보기로 한다. 마무리에서 얻는 교훈은 중요하니까.



1. 나의 고통을 전시하던 사람들

 코로나는 인류의 불행이고 이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손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역병의 경고를 무시했던 신천지와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각계의 빌런들은 모든 국민들의 비난을 정중앙으로 맞았다. 나와 이웃에 피해가 가지 않게 조심했던 사람들마저 감염에 감염을 거듭했고 질병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나의 고열도 마찬가지였다. 고열과 근육통이 시작된 이후부터 나는 두려움과 기피의 존재가 되었다. 직장이 이태원 부근이고 이태원 클럽발 대규모 감염의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내 자매의 직장에서는 '김00 동생 감염 건' 이라는 제목으로 직장 동료가 모두 보는 게시판에 우리의 동선을 공개했다. 이미 코로나 검사 음성을 받은 뒤 2차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제대로 읽지 않으면 내가 이미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 실제로 한 직원은 언니에게 고성도 질렀다고 했다.

 "그러게 이런 시국에 이태원을 왜 가서!!"

동생 직장이 이태원 근처라고 항변했지만 내가 아팠던 건 사실인데다 무증상 감염자가 속출하던 시점이었고, 2차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이니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적인 비난에 단지 가족이었을 뿐인 내 가족에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빛과 '사회에 민폐를 끼친 가족을 둔 직원'이라는 꼬리표였다. 이 일은 투병일기 1화에 '난 죄인이었다' 라는 문장을 쓰게 한 단초가 됐다.

직원 게시판에 박제된 나와 가족의 동선


입원 중엔 이런 일도 있었다. 아픈 내가 걱정된다며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시던 어른이 계셨다. 그분은 이미 두 번의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고 급성폐렴으로 확정돼 비로소 일반 병실에 누워 안정을 취하던 내게 전화해 '국경 없는 의사회 출신 코로나 격리병원에서 자원봉사중인 아는 의사에게 알아봤는데', '내가 아는 누구에게 물어봤는데' 라며,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본인의 지인에게 내 상태에 대해 물은 내용을 20-30분씩 얘기하시곤 끊으셨다. 지인 의사가 말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사실 나는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맞으며 개인이 가진 면역의 특성(?)상 코로나가 무사히 지나가면서 급성폐렴으로 변이된 것(??)일거라는 얘기였다. 아직 확실히 연구된 바는 없는 질병이니 꽤나 신빙성 있는 얘기라며 '내가 코로나였나' 의심을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처음엔 그렇게 의심을 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잘 모르겠는데다 그 사실들이 투병중인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런가요, 그렇군요' 와 같은 응대를 했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분이 보내신 장문의 카톡을 보고 그분의 진심을 알게 됐다. 요약하자면

"사실 너는 코로나 확진이 맞으며, 운이 좋아 급성 폐렴이 되었지만 나는 너와 접촉을 했으니 코로나에 전염됐을까봐 두렵다.(?) 그래서 나도 자가격리중이며 너무 답답하고 가족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분은 내가 원망스러우신 거였구나.' 그래서 나는 그저 폐를 끼쳐 너무 죄송하다고 답장했다. 애초에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이었기 때문에.



2. 퇴사

원고 마감을 앞두었던 나는 내가 없으면 작업실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자의식 과잉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없는 동안 일은 똑같이 진행됐고, 내 일을 맡을 누군가는 어디에나 있었다. 오히려 순조로웠다.투병기간동안 고용된 새 보조작가는 인수인계 없이도 훌륭했다.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작가는 컴퓨터도 잘 다루고 싹싹했으며 요즘 트렌드에 빠삭했다. 놓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결코 놓을 수 없었던 이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감에 이제는 날개를 달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안도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병원 링거에 붙은 내 이름표 옆에 써진 (만33세) 라는 딱지를 보니 이곳에서 몸담은 4년이라는 내 시간이 처음으로 와 닿았다. 나 서른 살에 여기 들어왔는데 벌써 서른 넷이네. 몇 달만 있으면 35세다. 난 그동안 뭘 이뤘지?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느꼈고 이걸 치료하려면 퇴사만이 답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서 때려 치웠다.


3. 심리 상담을 받다

퇴사를 하고 제일 처음 한 외부활동은 심리상담이었다. 처음엔 내 안에 가득 들어찬 원망과 미움을 비워내는 게 목표였다. '예술인복지재단'에서 경력이 인정된 예술가에게 지원하는 상담심리치료를 전부터 눈여겨 봤던 나는 이 프로그램을 제일 먼저 신청했다. 가까스로 내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참 많구나.

상담  , 상담사님의 책상 위에 있던 곽티슈의 존재이유를 알았다. 눈물을 펑펑 쏟고 창피해하며  밖을 나왔다. 눈물이 줄줄 흘러 마스크가 축축했는데 속은  후련했다. 똑같은 얘기인데 친구에게 뒷담화 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느꼈다.  근래   만에 펑펑 울어본  같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한시간이 모자랐다. 평소에 자기애가 강하외부의 변화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성격이라 믿어왔는데 투병생활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주간 나의 얘기를 하다 보니  남친 얘기도 나왔고 부모님 얘기도 나왔으며 예전에 나와 싸우고 그만   직장 동료 얘기도 나왔다. 정말 별의  얘기를  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나에대해 재밌게 얘기하는   좋아한다. 그래서 마음껏 떠들었다. 상담사님은 주로 듣는 역할이었지만 내가 무심결에 표현하는 단어를 유심히 들으시고 이따금씩 생각의 방향을 잡아주셨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때 그런 감정이 든 이유는 뭘까요?' 

앗차 싶었다. 그제야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내면의 문제점이 수면위로 나왔다고나 할까,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렇게  고비를  고비를 넘으며 감정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해결책을 찾은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3달여에 걸쳐 12회차의 상담을   번도 빼놓지 않고 수행했고 상담사님 앞에서도 수다쟁이의 기질을 발휘하며 도란도란 옆집 언니와 대화하듯 내가 쓰고 싶은 글얘기, 꿈얘기도 마음껏 했다. 첫날은 펑펑 울고 나왔지만 마지막날은 웃으며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며 나왔다. 상담을 통해 얻은 교훈은 너무 허무하게도 '모든 사람이  같지 않다' 거였다. 이렇게나 당연하고 진부한 문장을  몸과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까지 34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는  놀라울 뿐이다. 결국 모든 문제와 괴로움은 나로 비롯해 생긴다는 얘기.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어온 법륜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문제라고 느끼니 문제가 되는 거다'



4. 힘든 이에게 선뜻 손을 내민다는 것

 평소에 친한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을 잘 하고 안부를 살뜰히 챙기는 편이라 자부하건만, 누군가에게 안좋은 일이 생기면 오히려 먼저 연락하기를 주저했었다. 상대방의 컨디션이 안 좋을수도 있고 정서적 불안으로 다른이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지거나 연락을 받기 싫을 수도 있을 거라는 나름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입원생활을 통해 알았다. 그건 그저 혹시나 상대방이 보일 수도 있는 공격적인 태도를 방어하기 위해 착한 척하며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입원할 당시는 코로나 대유행으로 문병은 고사하고 간병인의 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은 환경이었다. 병실의 건조하고 새하얀 벽에서 아침에 눈을 뜰 때, 개성 없는 흰색 멜라민 식판에 담긴 식사를 세 끼 내내 먹을 때,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땀에 흠뻑 젖은 베개커버를 갈 때마저 나는 늘 혼자였고 힘에 부쳤고 외로웠었다. 아침 저녁으로 카톡을 보내 관심을 기울여 준 내 친구와 가족과 지인들의 안부 인사가 없었다면 아마 크게 무너지지 않았을까. 그때 처음 알았다. 관심과 애정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에너지라는 걸. 다른 더 중요한 일에 할애했다면 큰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에너지를 내 건강과 행복을 비는 데 써 준 것이다. 툭 지나가듯 던져 준 단 몇 마디의 위로와 응원은 자칫 바닥을 칠 수 있었던 내 자존감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 주고 있구나. 착하게 살아야지, 나도 누군가 힘이 들 때 걱정해 줘야지."

 힘들 때 손을 내밀기란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렵다. 좋은 일을 함께 기뻐해 준 사람들은 내가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니 그러려니 하게 된다. 그러나 아프고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의 이름은 뇌리에 정확히 박힌다. 상처로 텅 비어버린 공간을 마음으로 메워줘서가 아닐까.
맹지였던 내 마음 한켠에 그사람의 지분이 생긴 것이다.


 코로나라는 시국 속 다른 투병생활과 조금 달랐던 내 경험은 단순히 아프고 낫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와 주변에 큰 민폐를 끼쳤다는 죄책감, 그보다 무서운 사회적 낙인이 있었고 이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였다. 무사 퇴원 후에도 이 스트레스는 원형탈모로 이어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눈을 뜬 모든 순간동안 바닥에 무수히 흩어져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웠고 거울을 볼 때면 정수리와 뒤통수 주변에 500원짜리 구멍 몇 개가 휑히 보이는 내가 서 있었다. 이런 날 구원할 수 있는 건 글도, 음악도, 티비보기도 인터넷도 아니었다.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 보며 쓸 데 없지만 쓸모 있는 긴 시간만이 답이었다. 다시 주어진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렇게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건 선물일까 불필요한 덤일까. 퇴원 후에도 폐 속에 남아있는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해 열 개가 넘는 약을 삼키며 느낀 것은 더이상 생의 의미를 찾지 말고 의미를 만들자는 거였다.

그래서 난 다시 브런치에 접속했고 느리지만 꾸역꾸역 연재를 이어갔고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1년이 넘지 않은 때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어 다행이다.

글을 마친다. 나의 이 글이 느슨해져가는 일상에 또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길 바라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시국에 급성폐렴이라니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