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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Nov 15. 2021

엄마는 왜 죄인이 되고 싶어할까

지금도 별명이 종합병원이긴 하지만 난 유독 어린 시절부터 약골이었다. 개근상을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위염, 장염에 늘 시달렸고 감기도 한 번 걸리면 두 달은 꼬박 기침을 했다. 열이 펄펄 나는 날이면 엄마는 아침해가 뜰 때까지 얼음물에 수건을 푹 적셔 땀으로 가득한 내 몸을 너덧번씩은 닦아주셨다.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엉엉 울면 엄마는 나보다 더 화를 냈다. 엄만 우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게 제일 화가 난다고 했다. ‘까짓것 덤벼봐!’ 하고 아득바득 살아야지, 이렇게 나약해 빠져서 어떻게 살아나갈 거냐고 나보다 더 화를 버럭 버럭 많이 내서 줄줄 흐르던 눈물도 쏙 들어가곤 했다.  어릴 땐 되려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화의 의미를 안다. 그건 엄마 자신에게 내는 거였다는 걸.


8살 때부터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해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쓰게 되자 엄마는 정말 속상해하셨다. 막내로 태어나 건강한 유전자를 못 주어 어린 나이부터 안경잡이로 놀림당하는 유년기를 안겨주어 속이 쓰리다고 하신 게 자책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도 내가 크고 작게 아플 때마다 엄만 늘 당신탓을 하셨다.


“막내라 그래, 네가 막내라…”


우리집은 대학교 인근에서 인쇄소를 했었다. 만삭의 엄마는 네명의 딸을 키우고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새벽까지 복사를 해야만 했다. 전자파가 가득한 복사기와 종이먼지, 본드냄새가 풀풀 나는 작업실에서 하루에 3시간씩만 자면서 일을 하다보니 코피를 흘리기도 부지기수. 제대로 된 태교도 못하고 죽도록 일만 했기에 지금의 약골같은 네가 태어난 것이라며 엄마는 35년 전의 임산부였던 자신을 탓했다.


엄마는 섬에서 태어나 마을에 몇 없는 공무원 아버지의 예쁨을 받고 자란 장녀였다. 부모의 밭일을 돕는 섬마을 아이들의 꾀죄죄하고 검게 그을린 몰골과 달리, 엄만 하얀 피부에 공부를 좋아해 늘 1등을 하던 꿈 많은 소녀였다. 똘똘했던 그 소녀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밭일 나가신 할머니 대신 늘 동생들을 업고 있어야만 했다. 영어 공부도 하고싶고 친구들과 고무줄도 뛰고 싶었지만 공무원 아버지의 월급으로 일곱 자식을 건사하긴 어려웠기에, 일나가신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 해야만 했다. 아기를 업고 고무줄을 몰래 뛰던 어린시절이 엄마의 책임감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반장에도 여러번 선출됐지만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넌 집에서 동생들 봐야 되는데 반장같은 거 해서 엄마 성가시게 만들면 크게 혼날 줄 알라” 며 매섭게 혼을 내셨다고 했다. 결국 반장을 기권한 엄마는 그때 외할머니의 윽박이 두고두고 사무쳐 일흔이 되도록 못 잊게 되었다.딸은 공부시킬 필요 없다던 할머니의 뜻을 꺾기 위해 단식투쟁 끝에 얻어낸 고등학교 진학. 드디어 섬마을을 벗어나 도시생활을 했지만, 졸업 후 취업을 하자마자 동생들의 학비바라지를 하느라 신발을 너덧번은 밑창을 갈아 기워신었다고 했다. 구두수선 아저씨가 그런 엄마를 기억하고 딱하다며 수선비를 깎아주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시어머니의 무서운 호령에 기가 잔뜩 죽어 다섯을 꼬박 낳았으나 모두 딸이었다. 그래서 엄만 원했던 아들이 아니었어도, 딸이어서 못하는 건 없어야 하고 어딜 가도 기가 죽지 않게 키우겠다 다짐했다고 한다.


몇년 전 어느날, 엄마는 대뜸 날 보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다섯살짜리 어린 네가 혼자 유치원 봉고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알아서 올라오게 한 거, 집에 홀로 계시던 할아버지 밥을 차려드리라고 한 거, 밤 11시 넘어까지 그 어린 애기가 엄마 기다리다 지쳐 잠들게 한 거 다 속상해. 널 너무 방치했던 거 같아서… 그런데 그땐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너무 바쁘고 정신은 늘 없었고 난 찬물에 밥말아 먹고 다니다 영양실조도 걸렸거든. 나이가 드니까 별 게 다 기억나서 억울하고 미안하고 짠해.”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치원에 다녀오면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나에겐 상상력이 발휘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넓은 거실에서 마음껏 그림도 그리고 종이비행기도 날리고 언니들 일기장이나 만화책도 훔쳐보면서 나름 재밌는 유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엄마에겐 방치였구나!

엄만 내가 반장을 해도 부반장을 해도 외할머니처럼 못마땅한 기색이 없으셨고 학교에서 어머니회 호출이 오면 인쇄소에서 복사를 하다가도 군말없이 뛰어오셨는데 이걸 마음 속에 담아두고 미안해하고 계셨다니 내겐 꽤 충격이었다.


“엄마,그거 기억 안나? 내가 유치원 다녀와서 엄마한테 10분에 한 번씩 가게로 전화해서 엄마, 똥마려. 엄마, 과자 어딨어? 엄마, 냉장고에 손이 안 닿아. 엄마, 노래불러줄까? 엄마랑 얘기하고 싶어서 성가시게 엄마 엄마 엄마… 전화테러 했던 거?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랬는데 엄마는 단한번도 바쁘다고 먼저 전화 끊자고 해본 적 없었어. 내가 엄마 끊어~ 할때까지 손님이 와도 무조건 전화기 붙들고 있던게 엄마야. 나 그래서 엄마가 나 방치했다고 생각 안하는데?”

엄마의 얼굴에서 짧은 미소가 스쳤다.

‘내가 정말 그랬어?’ 엄마는 기억을 전혀 못하시는 듯했다. 엄마는 내 말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셨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내 모든 어린시절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엄마의 휴식과 맞바꾼 것이나 다름 없다. 소나기 오는 날이면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을 나에게 늘 비맞고 왔냐, 친구랑 같이 쓰고 왔냐 물으셨고, 그냥 맞고 뛰어왔다 말하면 엄만 늘 먼저 자고 있던 내 머리를 쓸고 이마 온도를 짚어보며 새벽녘에 이불을 한개씩 더 덮어주셨다. 잠결에 엄마의 거친 손길이 이마에 느껴질 때면 엄마의 진한 미안함이 촉감으로 한가득 전해졌다.


엄마는 요즘 통 잠을 못 주무신다고 했다. 큰딸 걱정하다 보면 둘째딸 생각이 나고, 셋째딸 넷째딸 걱정까지 하다가 보면 새벽 두시, 제일 탈 많고 문제투성이 막내딸 걱정까지 하다보면 세시가 훌쩍 넘어 주무신다는 거다.


“엄마, 뇌 용량이 그렇게 커? 난 내 일만 생각해도 벅찬데 어떻게 그렇게 하루종일 우리 생각만 해? 대단하다. 해도해도 짝사랑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 농에 엄마도 피식 웃으신다.


“그러게. 일흔도 넘어서 걱정을 왜 그리 사서 하는지. 딸들도 나이가 마흔 줄인데.”


난 얼른 화제를 바꿨다. 10년도 더 전에 신경치료해두었던 이가 시큰해 다시 치료를 해야겠다고 지나가듯 얘기하니 엄마는 또 쓸쓸하게 대답하신다.

“내가 너 임신하고 복사만 안했어도…”

속상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엄마는 왜 죄인을 자처할까?


밖에서 있었던 얘기를 미주알 고주알 다 하던 모녀지간이었지만 앞으로 엄마에게 거짓말도 하고 숨겨버릇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엄마를 탓해야할 게 있다면,어른이 되려면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는 거다. 내가 앞으로 엄마한테 다 얘기하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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