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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Jul 28. 2023

돌아보니 그것이 시작이었다 1

체육 선생님의 5분 스피치 수업


 그날은 간만에 세찬 소나기가 내리던 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던 무더위가 한 풀 꺾이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습기가 교실을 에워쌌다.

체육 시간이었다. 수능 비포함 과목의 설움이랄까, 수능 공부에 지친 고3들의 체육수업은 대부분이 실내 수업이었다. 고3의 체육시간은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거나 내신 이론수업을 하는 게 암묵적 룰이었다. 그러나 우리 담당 체육선생님은 늘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자율학습을 시키는 대신 우리를 앉혀 놓고 수능에도 나오지 않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을 얘기해 주시곤 했기 때문이었다.

"너네... 대학교 가면 모든 게 수월할 거 같지? 아니. 그때부터 모든 게 배신의 연속이다?"


 '대학 갈래 공장 갈래 , 미팅할래 미싱 할래' 따위의 직업 비하적인 멘트로 입시에 등 떠밀 땐 언제고 대학 가면 배신을 당한다니. 그래서 대학 가지 말라는 거야 뭐야? 선생님의 폭탄 발언에 교실 아이들이 술렁였다.


"내가 대학 가자 마자 가장 심하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던 게 뭔지 알아? 사람들 앞에서 자기 생각 말하는 법을 교육과정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단 거야."


초중고 12년 동안 정해진 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머리에 넣고, 시험에 나온다는 문제를 달달달 외워버리는 엉덩이 싸움만 하던 우리가, 대학에 붙는 순간부턴 온전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뚝딱 해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짜예요?' 듣는 우리도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수줍은 체교과 청년이었던 선생님은 처음 대학에 갔을 때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적응이 안 되셨다고 한다. 공개 발표자로 앞에 서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리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발표 수업이 있는 날은 너무 긴장한 탓에 발표 직전에 도망가 F를 맞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금은 피나는 훈련으로 학생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됐지만, 선생님이 되고 나서부턴 아이들을 이대로 대학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실내 수업시간이면 선생님은 항상 '5분 스피치'라는 걸 시키셨다. 하루에 3 명씩, 5분 동안 교탁 앞에 나와서 혼자 떠들게 두는 거였다. 주제는 자유. 반 친구들에게 어떤 얘기든지 자유롭게 해 보라는 취지였다. 선생님은 우리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든 개입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린 주어진 5분이라는 시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워야만 했다.  처음엔 반발이 심했다. 수능이 고작 200일도 채 안 남았는데 소중한 자습시간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꿋꿋이 '5분 스피치'를 강행하셨다.


  5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무척 길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주어진 주제도 없이 청중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에 아이들은 쭈뼛거리고 당황스러워했다. 내향적인 아이들에겐 특히 곤욕이었다. 간혹 자기소개, 생일, 혈액형만 주욱 읊다가 무거운 침묵으로 반 전체를 침몰시키는  트리플 내향형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점차 자신의 최애 아이돌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준비한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아이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교과목 선생님들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공부에 지쳐 서로 얼굴 볼 새도 없는 아이들은 교탁 앞에 선 발표자 친구에게 눈을 맞추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5분 스피치가 있는 체육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건 오로지 청중 역할의 아이들 뿐, 발표 순서가 다가오는 당사자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반에서 특별하게 나대지는 않아도 꽤나 활발한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조금은 외로운 고3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오해로 학기 초부터 함께 놀던 무리와 서먹해졌고, 예체능이라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대신 강남으로 입시 레슨을 다니느라 딱히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가 없었다. 야자를 하며 돈독하게 친구들과 야식을 먹는다거나 감독 선생님을 피해 키득대며 몰래 수다를 떠는 등의 추억을 쌓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기 내내 티 나지 않게 겉도는 학생, 그게 나였다.


어느덧 내 5분 스피치 차례가 왔다. 학교-집-강남 레슨 스튜디오 밖에는 가지 않는 내가 친구들에게 해줄 얘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서라도 내게 주어진 5분을 채워야 했다. 그래서 난 무작정 어제 있던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7교시가 끝나고 학교를 나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강남까지 가는 길에 본 여러 풍경들과 광인들의 천국 1호선의 천태만상 승객들에 대한 얘기였다.


   "학교에서 나와서 지하철을 탔어. 어제 따라 이상하게 내가 도착한 바로 그 타이밍에 횡단보도에선 초록불이 딱 켜지는 거야. 그러더니 버스도 딱 맞춰  오고, 버스를 타니 딱 내가 앉을 한 자리만 남아 있는 거야. 그렇게 모든 게 딱딱 들어맞는 게 기분이 좋았어. 원래는 늘 버스 타이밍이 안 맞아서 굶은 채로 지하철을 타는데, 어제는 김밥도 한 줄 사 먹고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운이 따르는 날이었어."



긴장으로 시작한 내 이야기에 아이들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플랫폼에 들어서자마자 또 바로 지하철이 도착했어. 얼마 가다 보니까 손수 만든 조악한 대형 십자가를 든  아저씨가 타는 거야.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그 사람은 바로 발성 좋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기 시작했어.  왜, 세탁소 아저씨 세탁~세탁~하는 거 알지? 그런데 그때, 반대편에 앉은 어떤 아저씨가 그 소리에 맞춰서 엄청 크게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는 거야!



예수~(히끅) 천국~(히끅) 불신~(히끅). 지옥~(히끅).


 


그 칸에 있던 모두가 신경 쓰진 않는 거 같았는데 난 그게 음악의 리듬처럼 들렸어. 마음속으로 거기에 맞춰서 랩을 하면서 킥킥대면서 계속 갔지. 그러다 다음 역에선 엄청 짧은 숏컷 머리 아줌마가 탔어. 가슴까지 잔뜩 올려 입은 쫄바지와 더러운 게 잔뜩 묻은 흰 티셔츠, 화장실에서나 신을 법한 슬리퍼를 신은 모습이 당연히 예사로 보이지 않았지. 그 아줌마는 타자마자 매우 우렁찬 소리로 승객 한 명 한 명 앞에 차례로 서서 '500원 있어요?'를 외쳤어.

상상해 봐. 그 칸이  어땠을지.​

예수~(히끅) 500원, 천국~(히끅). 있어요? 지옥~(히끅) 500원!

불신~(히끅). 500원, 지옥~ (히끅) 있어요?(히끅)"​


머릿속으로 조합했던 음률에 맞춰 그 칸에서 있었던 소란을 비트박스처럼  재연하자 반에선 폭소가 터졌다. 깔깔깔..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자 나는 조금 더 용기가 생겨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그다음 정거장에선 대낮에 술을 잔뜩 먹은 할아버지가 탔는데, 타자마자 시끄럽다고 역정을 내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이 사람도 혀가 꼬여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시끄러워 이놈들아!' 소리치다가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500원 아줌마가 조용히 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나중엔 열이 받았는지 다른 사람 뺨이 아니라 자기 뺨을 때리기 시작했는데..."


나는 앞에 앉은 아이 세 명을 찍어

예수천국불신지옥 역,

500원 있어요 역,

딸꾹질아저씨 역을 주고 동시에 흉내를 내게 했다. 지명당한 아이들은 신나서 자신이 맡은 역할의 대사를 밴드 악기 화성처럼 쌓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들이 부르는 그 리듬에 맞춰 술 취한 노인이 자신의 뺨을 치는 흉내를 냈다.


"예수. 짝! (히끅) 짝! 500원. 짝! 천국(히끅). 있어요?. 지옥!! 짝! (히끅)"


"불신.(히끅) 짝!. 500원. 짝! 지옥! (히끅) 있어요? 짝! (히끅!)"

​.

.

.

"만약 그날 그 타이밍에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안 켜졌다면, 그 타이밍에 버스가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김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이런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사실 우리가 매일 겪는 모든 순간이 모두 우연처럼 짜 맞춘 신의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던 하루였어… 끝~  "



이야기가 끝나자 선생님까지 포함해 교실 전체가 500원~을 외치며 발을 구르고 난리가 났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5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우리 반에서 처음으로 5분이라는 스피치 시간을  꽉 채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해냈다는 안도감으로 의기양양하게 인사를 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데 어떤 친구가 선생님께 말했다.



"편리(가명) 발표 한 개만 더 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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