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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Jul 28. 2023

돌아보니 그것이 시작이었다 2

애벌레 스토리텔러


"편리 발표 한개만 더 하면 안 돼요?"


당연히 선생님께선 다음 차례가 있으므로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으나 예상은 반대로 흘러갔다.


"그럴까? 얘기 하나 더 할 수 있어?

"네??"


헉. 물론 지하철 얘기도 미리 준비했던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즉흥적인 제안이라니...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때 나를 쳐다보던 반 친구들의 눈빛들이 보였다. 고3 같은 반이 된 이래로 처음 보는 초롱한 표정들이었다.


'아, 모르겠다.' 뭐라도 얘기 해야지 싶어 일단 떠오르는 얘기들을 막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아빠가 했던 말실수 일화를 몇 개 풀었다.

짤막하게 설명하자면 윤도현 밴드를 보면서 전도연 밴드라고 한다거나 랍스터 드시고 오셔서 햄스터 먹었다고 하신다거나 터미네이터의 주인공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아놀드 파마라고 하는 등의... 그런  소소한 실수담들이었다. 지금 보니 별로 웃긴 얘긴 아니지만 한 번 탄력을 받아서인지 반응이 또다시 좋았다.


​'하나만 더' 요청이 또 들어왔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나는 그때부터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나만 관찰한 수학선생님의 특이한 말버릇, 중학교때 덕질하다 최애 차까지 탄 얘기, 우리 자매들의 다 다른 성격 얘기, 우리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학생경찰로 차출됐다가 조선인 잡는 거 찜찜해서 못 잡은 척 도망다닌 얘기 같은, 내 19년 인생 기억에 남는 썰들을 박박 긁어 모아 풀었다.


마지막으로 국어선생님 성대모사를 하고 있는데 귓전에 조악한 미디사운드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리기 시작했다. 끝나는 수업종이 었다. 아뿔싸. 나 혼자 40분을 떠들고 있었다!!


​​


   수업을 위한 조별 발표도 아닌 일상 얘기를, 그것도 이렇게 긴 시간  40명 가까이 되는 친구들 앞에서  떠들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본 터. 게다가 단 한명도 잠을 자거나 딴 짓 하는 친구가 없이 모두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반응해주고 슬퍼해주다가 깔깔 웃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체육선생님은 날 교무실로 부르셨다.



"너 성악한다며. 노래 잘해?"

"전공하는 입시생 정도죠 뭐"

"그럼 너 이번 가을 체육대회 때 앞에서 대표로 애국가 좀 불러라"

"왜 제가 해요?"

'내가 볼 때 너는 노래를 하든, 말을 하든, 사람들 앞에 서서 니 얘기를 할 일이 생길 거 같다. 무대 연습이라고 생각해.'​




선생님의 명령에 체육대회에서 애국가를 대표로 부르긴 했으나 나는 그의 예언대로 되지는 못 했다.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더이상 무대 위에서 노래는 커녕 사람들 앞에 서서 말도 하지 않는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던 어느날이었다. 나는 정신 차려 보니 6년차 방송작가가 되어 있었다. 기억 속에 거의 파묻혀 있던 이 얘기가 다시 내 뇌리에 재등장 한 것은,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깨끗이 버리고 대뜸 직업을 바꿔 음지에 묻혀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생각을 짜내던 보조작가 시절이었다.​ 문득 메인 작가님께서 물으셨다.


"네가 이 직업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가장 최초의 기억이 언제야?"


음.........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선뜻 계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그냥... 하다 보니?어쩌다?


그러자 작가님은 분명히 너도 그런 시기가 있었을 거라며 자신의 얘기를 해 주셨다.


작가님은 학창시절에 반장이었다.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급히 쓰러지시는 바람에, 한시간동안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라는 교감선생님의 명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좀 재수없고 말수 적은 모범생타입이라 친구들의 미움을 받는 편이었던 자신에게는 (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림) 아이들을 통솔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 위축이 됐다. ​

여고생 작가님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가 당시에 읽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내용을 반 친구들에게 천천히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재잘재잘 떠드는 잡담과 시끄러운 교실의 소음 속, 아무도 관심 없는 듯하던 목소리 작은 반장의 얘기는 점점 학우들의 이목을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치명적인 금단과 순애를 넘나드는 어느 이름모를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어느 순간 친구들은 몸이 달아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를 묻기 시작했다.

작가님은 그때 처음 느끼신 거 같다고 했다.

나에게 무언가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관련 학과로 진학해 거의 2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이야기에 온몸에 전율이 돌 정도의 기시감이 들었다. 우연한 기회로 어쩌다 보니 하게 된 뜻밖의 직업이라, 내겐 그 어떤 자질도 경험도 없다고 생각하며 도대체 '어쩌다 내가 이 길로?'를 내내 의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평행이론 같은 경험을 들으니 충격적일 따름이었다.

나 사실, 잠재력이 있었던 거야??


어쩌면 고 3 그 여름, 이 직업으로 들어오게 된 출입문 같은 걸 열어놓은 채 돌고 돌아 다시 문을 통과해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해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거라면, 끝마침 또한 운명에서 비롯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시작은 뜻밖의 상황들이 빚어낸 우연이었지만, 훗날 이 일을 마칠 땐 어느 누구의 뜻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이 문을 닫았으면 한다. 돌고 돌아 왔지만 내게도 무언가를 가졌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참 좋은 길이었다, 하며.




김영식 선생님 당연히 제가 기억 안 나시겠지만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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