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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Oct 11. 2023

1. 노래하는 데 돈을 가장 많이 쓴 방송 작가

나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무대 위에서 드레스 입고 조수미처럼 오페라를 공연하는 그 클래식 성악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루 아침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이런 저런 동네 외곽의 노래대회를 나가면 상을 타오곤 했다. 어린이 합창단에서 솔리스트도 몇 년간 놓치지 않았고 학교에서 합창대회를 하면 나는 늘 지휘를 했다. 음악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음악인이 되지 않는다면 나의 미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피아노 앞과 무대 위가 아닌 컴퓨터 앞에서 워드 프로그램을 켜고 앉아 있다. 후회는 없다. 그저 지금은 작가로서 이런 독특한 이력은 결국 내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하면서. 언젠가 조금 경력이 쌓이면, 노래하다 글을 쓰게 된 이야기를 에세이나 코믹 드라마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했었다. ‘음악을 전공한 방송작가는 대한민국에 나 밖에 없을 거야!’ 라는 나름 독특한 이력의 작가임에 자부심도 있었다. 그렇게 쉴 틈 없이 글을 쓰며 달려오니 어느새 10년차 방송작가가 되었다. 이제 슬슬 연차도 쌓였겠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 보따리를 좀 풀어볼까 싶던 어느날, 새로 방영하는 드라마 한 편의 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였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를 쓴 작가님이 무려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 출신이시라는 거다. 심지어 미국 명문대 유학파 출신이시기까지? 클래식 음대 출신 작가는 내가 최초일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을 줄이야! 

'젠장. 한 발 늦었다...'

아무도 경쟁심리를 부추기지 않았지만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최초이자 유일무이의 타이틀은 조금 틀어 다시 셋팅해 보면 된다.

'성악과 출신 방송작가는 나 밖에 없겠지' 로!

그렇다. 노래 배우는 데 돈을 -부모님 돈을- 제일 많이 쓴 작가는 대한민국에 나 밖에 없지 않을까?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인 <토스카>라는 작품엔 세상의 모든 소프라노들이 부르고 싶어하는  Vissi d'arte, Vissi d'amore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라는 아리아가 나온다. 비장함과 애절함, 연약함, 고고함, 청순함 이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연기력과 동시에 소프라노의 벨칸토 발성 테크닉의 정수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마스터피스다. 모두가 부르고 싶어한다고 앞서 말했지만, 나는 예외였다. 나는 오페라를 싫어했다. 서양인의 가발을 쓰고 외국말로 노래하는 오페라는 너무 지루했고, 여자 주인공은 매일 폐병에 걸려 죽으며 노래 가사는 쓸데 없이 가르치려 들고 고루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산다니...이 무슨 낭만 쌈 싸먹는 소리인가'

노래로는 밥 벌어먹고 못 살겠다, 사랑에는 더 못 살겠다! 난 그렇게 음악을 버리기로 했다. 노래도 사랑도 잘 모르겠던 20대 음대생은 소리 없이 죽는 백수가 안 되려고 열심히 딴짓을 했다.

 

나는 클래식보단 케이팝과 힙합, 알앤비를 더 좋아하고 무한도전과 1박2일, 나만 이해 못했나 싶은 인디 영화와 미국 시트콤에 빠져 있는 날라리 음대생이었다. 쉽게 간 대학도 아니면서 나는 더이상 클래식은 공부하기 싫다며 발악했다. 오로지 장학금을 받으려고 들어간 음대 학생회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음대 학장 퇴진 운동 같은 운동권 비스무리한 급진적 활동의 맨 앞 줄에 서 있었다. 3학년 땐 정신 차리고 다양한 공부를 해보자며 언론정보학부를 복수전공하느라 대학을 한 학기 더 다녀서 등록금-부모님 돈 2-을 더 썼고, 여차하면 음악 선생님이라도 되겠다며 보험성으로 교직과정도 이수하느라 누구보다 숨가쁜 대학시절을 보냈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지만, 누구보다 노래를 부르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가득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어쩌다 보니 음악에 약간의 발을 담그는 것으로 나의 방송작가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KBS의 클래식 음악방송 작가가 된 것이었다. 짜릿했던 첫 대본 작성을 시작으로 나는 음악이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 교양국과 예능국의 여기저기를 떠 다녔다. 홍수 뒤의 내린천 급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방송계에서 살아남으려, 내가 가진 나만의 문장력 하나를 목숨줄인양 붙잡고 쉴 새 없이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그 목숨줄인 줄 알았던 내 무기는 산산히 부서진 나무 판자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무렵... 나는 온에어가 막 진행되는 한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보조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게 아마 서른이었던가. 나는 그때부터 고민했다. 글 쓰는 걸 제대로 배우지 않고 이렇게 얼렁뚱땅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나는 글 보다 음표를 더 많이 읽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마감을 지키기 위해 새벽 내내 또각또각 타이핑 되는 한글자 한글자에 눈물을 함께 뿌렸다.


처음으로 글을 쓰는 즐거움을 느꼈던 그 때를 돌이켜 본다. 수없이 반려당하고 단 하나 살아남은 그 대사를 주연배우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TV속에서 그대로 읊어줬던 순간이었다.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이 터져 나왔다.

"이제 나 작가 맞는 거 같아!"

자칭 작가 11년차가 된 지금, 마음 저 멀리 묻어두었던 줄 알았던 노래로는 조금 사는 법을 배웠고 사랑엔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젬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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