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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Oct 19. 2023

3. 유학은 개나 소나

 단 한 톨의 미련도 없이 한국을 떠났다. 단돈 108만원에 구한 베를린과 인천의 왕복 티켓 하나와 대학원 입학 서류, 노트북, 큰맘 먹고 새로 산 백팩에 한국 인스턴트 음식을 잔뜩 싸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포함해 모두가 반대했던 유학길이었다. 다른 동기는 없었다.

'네 소리는 따뜻해.'

선생님이 내 소리를 듣고 얘기해 주신 그 단 한 마디가 추진력의 전부였을 뿐.


유학길에 오르기 전, 나는 틈틈이 독일어 학원에 다니며 대학 입학에 필요한 어학 시험을 치르고 인생에서 가장 많은 노래 연습을 했다. 독일이라는 나라를 나의 목적지로 정한 것은 돈 문제가 가장 컸다. 학비가 거의 무료라는 것, 물가가 안정되어 있다는 것. 그게 최대의 메리트였다.

내가 도전한 학위는 독일 음대 석사(마스터) 과정. 돈만 있으면 '개나 소나' 다 따오는 게 유럽 음대 학위라며 후려치기 당하던 시절이었다. '20대를 몽땅 바쳐 생고생하며 공부해서 다 뭐 하냐? 그렇게 돌아와 봤자 음대 전임교수님께 싸바싸바하며 시간강사 자리 하나라도 얻으려 굽신거리기나 하지.' 내 주변 사람들은 그게 바로 냉정한 한국 클래식 음악의 현주소라고들 했다.

어쩌면 맞는 소리일 수도 있다. 전국의 음악대학 전임 교수님들은 현재도 날아다니시며 왕성한 연주 활동 중이시니 당연히 내가 설 국내 무대는 적을 것이고, 해외 무대에서 먼저 인정이라도 받지 않으면 한국에서 음대 교수가 된다거나 유럽이나 음악가로 일자리를 얻어 살 수 있는 건 바늘 구멍에 낙타를 끼워넣는 것 만큼 어려울 수 있었다. 나는 반문했다.

'유학 가는 게 개나 소나 가는 거라면,유학 안 다녀오면 개도 소도 못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난 뭐가 되는 거죠? 일개미?'

나 역시 개미 쪽보단 수많은 개와 소들 중의 한 마리가 되고 싶었다.



 학부 4학년 부터는 대학 입시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곡을 연습했다. 새로 만난 나의 노래 선생님은 '노래' 그 자체에 이미 학을 뗀 나에게 음악을 사랑하는 법 부터 알려주셨다. 노래가 다시 즐거워질 줄은 몰랐었다. 나는 밤새 곡을 분석하고 4학년 때는 실기 성적도 중간 이상의 등수로 올랐다. 알반 베르크나 드뷔시의 꿈결같은 멜로디를 노래하며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나를 그려 봤다. 화려한 조명 아래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나, 정말 끝내주게 멋지잖아..? 재능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매번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학과 연주 수업에서 부들부들 떨기만 하며 내려오던 나의 초라한 모습은 더이상 없는 것 같았다. 독일 음악 대학원 입시 준비를 위해 선생님께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은 내가 노래를 처음 배웠을 때인 어린이 합창단에 가던 날 만큼 가슴이 뛰었다. 선생님은 당신의 인생 첫 제자였던 나에게 거의 무료로 추가 레슨을 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함께 응원해 주시기 까지 하셨다. 아아…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반드시! 독일에서 성공해 우리 선생님의 이름 석 자를 드높이는 성악가가 되리라! 나는 악보 첫머리에 '성공하자!' 네 글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당시 우리집은 내가 태어난 이후 경제적으로 가장 팍팍했던 시기였다. '아빠의 무리한 투자'라는 굉장히 흔한 클리셰(?)가 우리 집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공부 해서 장학금만 받을 줄 알았지, 유용할 수 있는 현금을 제대로 모아 본 적 없는 나는 대학생들이 흔히 한다는 커피숍 알바 조차 거의 안 해봤던 터라 용돈을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졸업반에 난생 처음 레슨 구직 사이트에 글을 올려 동요를 가르쳐준다며 발품팔이로 어린 학생들의 집을 전전했다. 그렇게 어찌 저찌 비행기 티켓까진 저렴하게 구했으나 체류할 생활비 까지는 거의 모으지 못했다. 허나 뜻이 있는 사람 앞에 고속도로가 개통된다 했던가, 운이 좋게도 졸업하자 마자 두 달 반 정도 인천의 모 여고에서 음악 선생님의 장기 병가 자리를 메꾸는 기간제 교사 자리의 제안이 들어왔다. 이력이라곤 ‘00음대 졸업, 교직 이수’ 밖에 없는 이력서를 두말 없이 넣었다. 상황이 급박해 일주일 만에 급하게 구하는 터라 내가 바로 낙점 됐다. 나의 인생 첫 직장생활이었다. 초임 교사 생활은 생각보다 잘 맞았다. 경험 미숙의 어리숙한 음악 선생님의 지도에도 까르르 웃어 넘어가는 저 발랄함과 순수함이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여고생들과 친구처럼 아이스크림도 까먹고 학생들의 체육복 겉옷을 걸쳐 입고 노래를 부르며 교정 내를 뛰어다니다가 두발 불량으로 학생 주임 선생님께 잡히기도 했다.


“자네는 무슨 깡으로 머리를 그렇게 갈색으로 물들였나? 몇 학년 몇 반이야?“

“…지난 주에 기간제로 온 음악교사입니다.”


학교로 출근하면서 왜 어른들이 그렇게 여자는 교사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칭송하는지 몸소 알았다. 나는 담임이라든가 부장 소임도 없는 천둥 벌거숭이 초임 기간제 교사라서 아이들의 하교와 함께 퇴근이었다. 마침 내 근무 기간은 9-10월 경이라 추석이 끼어 있어 쉬면서도 명절 보너스까지 챙겨 받게 됐다.  ‘교사 되게 좋잖아? 눌러앉아?’ 하는 타협의 욕망이 잠시나마 꿈틀거렸다. 그러나 내 마음 한 켠에는 꿈이 있었다… 미련의 눈물을 닦으며 한눈을 팔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 돈을 몽땅 유학비 마련 통장에 넣어 두었다. 길지 않은 유학 생활에 단비같은 생활비가 될 자금들이다. 통장에 찍힌 추석 보너스 입금 내역을 보며 '이게 다 지금 이 시기에 유학을 가라는 신의 계시인 거지' 했다. 아, 혹시 얘기 안 했던가. 나는 지독한 운명론자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이 쌓인 아이들과 눈물의 이별식을 하고 (눈물은 사실 안 나왔다) 약 3개월 쯤 뒤, 홀가분하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을 경유해 도착한 베를린의 테겔 공항은 한밤중. 난생 처음 밟아 본 유럽 땅이었다. 나름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입국 심사대에서 첫번째 난관이 찾아 왔다.

“Warum sind Sie nach Deutschland gekommen?” (독일에는 왜 오셨습니까?)

이상해! 내가 배운 독일어가 아니었다!  ‘봐흠, 진치 낰 도잇츌른 겍콤믄?’ 이라고 들리는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Wie bitte?”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를 세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내가 한국 독일어 학원에서 ‘바룸, 진트 지 나흐 도이췰란트 게콤멘?’ 라고 수없이 정직하게 연습했던 발음과 같은 문장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환영사처럼 느껴졌다.


베를린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지런히 어학원에 등록했고 친구도 사귀었다. 감자 한 무더기가 단돈 1유로, 커다란 빵은 불과 50센트, 그러나 한국인의 소울과도 같은 마늘은 단 2쪽에 4유로인 이상한 물가의 나라 베를린. 내가 자리잡은 동네는 터키 이주민들이 모여 살던 베를린 베딩지역 인근의 어느 외진 동네였다.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면 10대들이 날 보고 눈을 찢으며 '니하오' 인사했다. 어느 정도 짧은 독일어가 들리기 시작한 2개월차 부터는 이런 저런 교수님들께 메일을 써 레슨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노래 연습은 독일어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구매해 집에서 했다. 어느날 아랫층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더니 '방금 네가 노래한 거야?' 물었다. ' 무서워서 쫄았다. ‘층간소음 없는 집이랬는데... 집주인 아줌마한테 사기 당했네' 생각하며 겁을 덥석 집어먹고 그렇노라고 실토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매일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줘서 고마워. 신이 주신 재능으로 마음껏 노래해줘!' 라며 꽃 한송이를 주고 갔다.

아아, 그제야 실감이 났다. 베를린은 예술의 도시였지!  나는 그제야 베를린의 낭만적인 예술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마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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