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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Oct 19. 2023

4. 유학에 실패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의 순위가 확실한 한국과 달리, 독일은 지역마다 국립 또는 시립 음대가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고 유명하고 좋은 교수님들이 많았다.그래서 나에겐 ‘가고 싶은 학교 1,2,3지망’ 같은 건 없었다. 내 목표는 오로지 '나를 뽑아주는 음대' 였다. 나는 대도시 소도시 가리지 않고 지역마다 있는 국립 음대의 시험을 보기 위해 고속 열차인 ICE를 타고 전국 어디든 갔다. 싸구려 호스텔에서 웬 여행객의 상상을 초월하는 발냄새에 잠을 30분도 채 못 잔 날에도, 호텔의 간단한 조찬 뷔페에서 나온 상한 햄을 먹고 설사병에 걸린 날도 번호표를 뽑고 한 나절을 기다려 실기시험을 치렀다.


운 좋게 대면 면접까지 간 학교도 더러 있었다. 교수님의 '너 몇 년도 생이니?' 라는 기초 독일어 질문에 극도로 긴장한 탓에 '887년이요' 라고 대답해서 교수님들이 웃느라 뒤로 넘어가게 만든 탓에 당연히 면접은 망했고 학교들은 시원하게 떨어졌다. (변명하자면 독일어 초보에게 숫자 말하기 만큼 고역은 없다. 1987년도를 얘기하려면 두 자리씩 떼어서 '19+백+7 그리고 80' 이라고 대답해야 했다.)


나는 베를린으로 올 때 애초에 편도가 아닌 왕복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었다. 대학원 입시에 성공하면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바로 정착, 떨어지면 깨끗하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름 시험에 임하는 강렬한 야망의 표명이랄까. 돌아가는 티켓을 쓰지 않기를 바라며 시험에 임했지만 결과들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학교에 합격해 들어간다 해도 말 한 마디 못 알아듣고 다니느니 초반에 조금 더 바닥에 굴러보는 게 낫겠다는 용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아직 시험이 남은 학교가 있기에 조금 더 힘을 내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침대 아래로 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은 떴지만 몽롱한 기분이 여전히 꿈 같았다. 팔을 침대에 짚어 움직여 일어나려는 몸부림에도 내 등은 땅에 착 붙은 것처럼 일으켜 세워지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기분에, 같은 집에 살던 선배를 깨워 내 몸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고 그는 피식 웃었다. '진짜로. 진짜로 몸이 안 움직인다고.' 심각하게 누운 채로 말하자 선배가 힘을 주어 나를 일으켰다. 나는 목각인형처럼 침대에 힘겹게 앉혀졌다. 그 순간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척추뼈 마디마디에서 천둥처럼 '우두두두두둑' 뼛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선배도 나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신히 일어나 한 걸음 내딛으려는데 발 하나 뻗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목 부터 엉덩이까지의 뼛 속 전체가 전기에 맞은 듯 저릿저릿해서 털썩 주저앉았다. 며칠 뒤 간신히 걸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날이 지날 수록 쑤시고 저릿저릿한 통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는 절뚝이며 남은 시험을 보기 위해 진통제를 사먹고 4~5여 시간이 소요되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몇 군데의 시험을 더 보러 다녔다.

   

‘똑딱’ 화면 전환을 하듯 실기시험 기간은 쏜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원서를 냈던 곳들의 시험을 빠짐 없이 다 봤고 합격 결과 편지가 올 때까지 베를린에 당분간 체류해야 했다. 합격이든 재수이든 그 사이에 몸이 나아야 할 것이었는데 독일 병원에 가는 건 왠지 겁이 났다.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이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을 내 짧은 독일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한 학교에서 '시험에 붙었다' 는 편지가 왔다. 뛸듯이 기뻤다. 그런데 편지에 함정이 있었다. 더 자세히 읽어 보니 ‘합격은 했지만 입학은 불가’하단다. 이게 무슨 술은 먹었으나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소리? 알고 보니 독일 대학교엔, 합격 점수는 충족했으나 담당 교수가 미리 다른 학생을 자신의 수제자로 점찍어 뒀거나 새로 받을 수 있는 학생의 정원이 모자라게 된 경우 '일단 널 괜찮게 봤으니 다음 시험때 다시 보자' 라며 보류하는 기약 제도가 있었다. 결국 그 해 입학은 할 수 없는, 일종의 희망고문 같은 거다. 붙었지만 떨어졌다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편지였지만, 학교에 모두 다 떨어진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내 노래가 이 유럽 땅에서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인정받은 것 아닌가. 그래서 다음 겨울학기 입시에 도전해볼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 척추뼈 통증이었다.


나는 결국 통증을 이기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선택했다.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라 제법 큰 병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수없이 병원을 돌았다. 어떤 병원도 내 병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이 몸을 가지고는 독일은 커녕 무대에 걸어가 설 수도 없었다.

'성공하자', 악보에 써놓았던 내 네 글자의 굳은 다짐은 독일로 떠난지 약 1년 만에 한국에 있는 내 방 침대에 누운 채, '실패했다' 라는 나락의 짧은 문장으로 마침표가 채워지고 있었다. 다시 온전하게 걸음을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았다. 왠지 새로운 길이 있겠지, 어쩌면 이것도 모두 운명 아닐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했다.지금 당장 이 병의 원인을 알지 못 하면 언제고 다시 아플 수가 있으므로 겁이 났다. 나는 어쩌면 낯선 생활에 날이 서 있었고 지쳤던 건지도 모른다.그렇게 병을 핑계삼아서라도 다시 불확실한 유학생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던 것 같다고 지금에야 생각해보는 것 뿐이다.


몇 달 뒤 큰 병원에 가 피검사를 비롯해 유전자 검사까지 하고 나서야 내 병의 원인이 밝혀졌다. ’뼈 속이 쿡쿡 찌르면서 아파‘ 라는 나의 말에 우리 엄마는 ’니가 뼈 속 상황까지 어떻게 알아? 다리가 아프면 아픈거고 근육이 아프면 아픈 거지.‘  하며 내 병이 간단한 것이기를 바랐지만, 내 감각은 정확했다.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뼛 속이 딱딱하게 경화되는 면역성 질환이었다.


병명이 나왔을 때 그 병이 뭔지는 정확히 파악되진 않았지만 나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아직도 그 때 들었던 묘한 해방감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난치성 질환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며 어쩌면 이 병이 심해져서 척추와 온 뼈마디가 무시무시하게 구부러진 채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경고도 이상하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기뻤다. 내 인생에 그저 새로운 막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집에는 널 서포트 할 그만한 돈이 없다며 엄마 아빠가 회유를 했던 노래였다. 그러나 나는 내 재능 하나만 믿고 밀어부쳐 왔다. 아무도 내게 유학을 가라고 등 떠밀지도 않았다.하지만 난 교통 파업이나 폭풍우가 들이치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은 채로 마을 버스,지하철, 버스를 갈아타고 왕복 서너 시간을 돌아 서울까지 노래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노래를, 음악을 나는 그만큼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제는 합법적으로(?) 그만 두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락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이제는 도망쳐도 돼‘ 라는 안도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묘한 짜릿함이란… 아무도 응원하지 않았고 미련만 그득히 남은 미약한 재능에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브레이크가 걸리기를 나는 아마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병의 원인을 알고 약을 먹기 시작하자 몇 개월간 나를 지독히 괴롭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통증도 사라지니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하늘을 무섭게 찔렀다. ‘어쩌면 이 약을 평생 끊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내 새로운 인생이 열릴 거야.’ 벅찬 마음으로 나는 포털 사이트에 음악과 전혀 상관 없는 새로운 직업들을 검색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의 웹 서핑 중에도 내가 자신있게 할 만한 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인터넷 창을 닫으려는 그 때, 거짓말처럼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린 배너 하나가 눈에 걸렸다.


<KBS방송 아카데미 작가반, 오늘! 한 시간 뒤 접수 마감>


나는 독일에서 자린고비처럼 돈을 아껴 그 와중에도 110만 원 정도의 생활비를 남겨 왔었다. 그런데 마침 아카데미의 등록금은 100만 원 이었다. 아아, 또다시 지독한 인연이 나를 강하게 이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송 작가라니, 언론 정보학을 복수 전공으로 공부한 건 모두 이것을 위한 신의 큰 설계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또다시 운명론을 믿으며 방송 작가 아카데미의 수강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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