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일본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최근의 한일관계로 인해 국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역사가 왜 되풀이되고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분명해진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 대마도 영주를 시켜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 명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뜻)을 핑계로 교섭에 나선다. 이에 조선의 조정은 김성일을 부사로, 황윤길을 통신사로 임명하여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한다.
가도입명이 아니라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함)임을 눈치챈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조정에 고하지만, 동인을 대표한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에게 아무런 조짐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주장한다.
왜 그랬을까?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서는 임금을 자극하여 정국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권력이 주는 당장의 달콤함에 취해, 사신으로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외면하고, 보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보고 들은 양 거짓을 보고해서,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다.
그로부터 430년가량이 지난 2019년 오늘을 살펴보자.
왕 대신 국민이 주권자이고, 동인과 서인 대신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었으며, 돈이 바로 권력과 직결되는 자본주의로 바뀌었을 뿐이다. 길을 내달라는 정명가도 대신 일본은 한국이 경제적 속국임을 주장하며, 일본이 세계를 선도하는 정의의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힘썼을 뿐 침략국이 아니며, 강제로 징용을 한 적도, 젊은 여성을 성노예로 강제 동원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자기합리화를 교과서에 싣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한국민이 역사 속의 불행으로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1965년 맺어진 한일협정으로 타결된, 무상 제공한 3억 달러로 모든 배상은 종료되었다는 게 일본의 억지 주장이다.
글의 목적이 역사가 어떻게 되풀이되는지를 살피자는 것이지, 이런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이후 70여 년간 돈과 정치 권력의 결탁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방 이전의 친일자본이 해방된 후에 자유당과 결탁했고, 그것은 공화당에서 오늘날 자유한국당까지 이어졌다. 2002년 대선 때 소위 차떼기로 불리는 사건이 그것을 증명한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자본이라는 권력을 틀어쥔 재벌까지 바뀐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여전히 권력을 누리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민족이니, 미래니, 독립이니 하는 개념에는 관심조차 없다. 선조 임금 때 김성일이 대변한 동인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의 현상 유지나 강화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던 JP의 ‘합바지론’도 그렇고, 1992년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씨를 비롯한 부산 지역의 기관장들이 모여 ‘정권을 빼앗기면 낙동강에 뛰어들자!’라며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도, 내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당장의 정권 창출이나 유지에 급급했던 임진왜란 직전 김성일의 ‘무사태평론’과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97년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2003년 패소 확정된 후, 국내에 진출한 일본기업을 상대로 2005년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2012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어제 뉴스에서 전하는 바로는, 일본 정부는 2013년 1월 박근혜 당선자의 정권인수위에 이 최종판결을 반드시 뒤집도록 온갖 압력을 동원했으며, 그것은 2017년 문재인 정부 초기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아베는 굴욕적인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일본을 탈바꿈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다. 그러려면 일본은 전범국이 되어서는 안 되며, 불의의 역사가 드러나서도 안 된다. 위안부와 강제징용이라는 부정적 역사를 학생들에게 안 가르치는 것도 그래서다. 심지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판결 난 배상액은 고작 1억 원에 불과하다. 그 돈이 없어서 보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한국은 국가가 개인이 하는 소송까지 강제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당장의 경제적 피해 때문에 민족의 자존심과 정의까지 팽개칠 수는 없다. 오히려 한국민이 모처럼 단결하는 기회를 제공해준 아베가 고마울 뿐이다. 극복한다면, 한국은 비로소 일본의 경제적 속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해결을 위한 문제는 일본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임진왜란 직전처럼, 정부와 대통령이 밉다고 일본 편을 들거나, 한국 경제가 곧 거덜이라도 날 것처럼 침소봉대하는 일부 여론과 정치인들의 행태가 그렇다. 어쩌면 430년 전과 그렇게도 닮았을까? 목전의 이익과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그 모습이!
식민사관을 배운 교사에게 역사를 배운 우리는 학교에서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조선을 ‘이씨조선’이라며 깎아내렸고, 찬란한 문화유산과 업적보다는 당쟁과 사화를 중요하게 배움으로써 ‘엽전들은 안 된다’라며 스스로 비하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학교에서가 아니라, 1920년대 태어나 일본을 경험한 부모님에게 배웠을 뿐이다. 혈서로써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 장교 출신의 대통령하에서는 그랬다.
역사가 왜 되풀이될까? 그것은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눈앞의 이익만 밝히며 당리당략만 추구하는 얍삽한 인사들이 어느 시대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기>
어제 뉴스룸에서 전하는 뉴스에 의하면, 같은 압력에 박근혜 정부는 굴복했고, 문재인 정부는 법치국가로서의 존재를 부각했다고 합니다. 3권분립에 근거해 사법부의 판단을 행정부에서 관여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한 것입니다.그리고 현 정부에서는 일본이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했습니다.
동인, 서인 또는 여당, 야당으로 나뉘지 않고 국내든 국외든 온 국민이 단결해서 일본에 대항한다면, 우리가 이기는 전쟁이 될 것은 불 보듯 확실합니다. 왜냐고요? 이 방법이 역사의 진실에 입각한 정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글 ‘아베의 일본’에서 쓴 것처럼,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시각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고자 쓴 글이었습니다. 사실 일본과의 역사는 몇 년을 공부해도 다하지 못할 만큼 복잡합니다. 정한론(征韓論)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김옥균이 주동이 된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일본은 한일합방에 주력했으며 지금까지도 아베와 같은 일본의 우익 인사들에게 정한론의 정신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니어로서 나이 든 사람이 남은 인생 동안에 해야 할 역할은,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으로 우리의 자식과 후배들에게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똑바로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