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러 활동을 끝내며
(이글은 정치적 사견에 불과한 글로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글을 혐오하거나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은 읽지 말고 그냥 지나가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유신 시대이었던 1970년대 대학생 시절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는, 당시 화제의 중심이었던 YS, DJ, JP 같은 분의 행적을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쓸데없는(?) 일에 감 놓아라, 대추 놓으라며 참견하는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저 정치는 나와는 상관없는 까마득히 먼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지냈다.
그렇더라도 유신 독재의 주역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에 부정적 견해를 가졌던 것은, 친구들과 대화에서 주워들은 풍월 때문이었지 무슨 정치적 신념이나 철학 때문은 아니었다. 어쨌든 스무 살이 넘어 투표권이 생기면서는 선거에서 무조건 야당인 신민당에 표를 주었으며, 고무신을 받거나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공화당을 찍으려는 부모님에게도 그 당에 투표하지 말라고 권했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것도 몰랐다.
2008년 미국에 경제위기가 닥치고 레이오프되어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바람에,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남는 시간에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는 ‘Sub-prime mortgage’가 무엇이고 왜 일어났는지 공부하고 이해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당선 전까지 ‘듣보잡’에 불과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2009년 5월, 오바마가 대폭 확대 시행한 실업수당으로 연명하던 그때, 그 사건은 밤잠을 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상까지 찾아볼 정도로 흥미를 유발했으며, 하릴없는 실업자에게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충분했다. 노무현이란 인물은 파고들수록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 상고를 나와 독학으로 사시를 거쳐 판사가 된 인물, 안정되고 편한 아스팔트 탄탄대로를 지척에 두고 스스로 멀리 있는 가시밭길을 택한 신념의 인물은, 이국땅에서 재취업이 요원하던 초라한 신세에 투영되며 자극과 동시에 위로가 되었다.
뉴저지에서 엘에이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역이민한 것은 2010년 말이었다. ‘경축, G20 정상회담 개최로 국격 제고’라든가, ‘국격 제고 총력전’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인천공항부터 서울 광화문 대로까지 곳곳에 걸리고, 뉴스에서도 ‘국격’이라는 낯선 단어가 온종일 시간마다 등장했다. 전두환 대통령 미국 방문 환송 인파에 강제 동원되었던 1980년대 초가 떠올랐다. 이놈의 나라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별로 없었다. 비싼 옷을 입으면 인격이 높아진다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조소가 나왔다.
한국에서 좋았던 일 가운데,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책을 빌리지도 않고 자료실에 지내며 종일 책을 뒤적거렸다. 나중에 할 일이 없어지면 원 없이 책이나 읽겠다는 소망 하나가 이루어진 셈이다. 살았던 미국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미국 역사를 다룬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적은 미국의 양심이라는 ‘Howard Zinn’ 교수가 쓴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80년 발간)’이었다.
미국이란 나라의 실상은 내가 생각했던 정의의 나라가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노예제도로 대표되는 인종차별만 있었던 게 아니라, 조선 시대보다 심각한 여성차별이 존재했었고, 악마보다 잔인한 아동 노동 착취가 공공연하게 일어났던 국가였으며, 총칼로 무장한 폭력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어릴 때 보았던 ‘황야의 무법자’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 의해 형성되었던 이미지는 완벽한 허상이었다. 미국의 현재는 수많은 민중의 피와 땀이 점철된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도 비로서 이해했다.
미국에서 자주 보았던 한인 신문은 미주중앙일보였다. 엘에이에서 블로그를 열고 글을 썼던 것도 같은 신문의 인터넷판이었다. 2007년 이명박 씨가 당선되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노무현같이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성공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조국의 홍복(洪福)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우매했다. 군대 시절 전우신문에 나온 전두환 장군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를 구국의 영웅이라고 착각할 만큼 어리석었으니 부연이 필요 없다.
돌아온 한국에서 MB가 사기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깨닫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민까지도 속여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자신의 치부 수단으로 삼은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 나라를 전혀 모르면서 무지와 환상 속에서 이민을 감행했던 것처럼, 서민 출신의 대통령은 일반 백성을 위해 정치할 거라는 잘못된 예단이 그릇된 평가를 낳았다. 알면 알수록 정치하는 자들의 치졸하기 짝이 없는 속셈이 들여다보였고, 그럴수록 한국의 정치가 재미있었다.
마치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힐러리를 물리치고 당선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2012년 12월 대선에서 박빙이기는 했어도 박근혜 씨의 당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신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 이외에, TV 토론이나 어떤 언행에서도 대통령으로서의 ‘깜’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당선은 MB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인 MB는 자신이 저지른 죗값 때문에 정권교체만큼은 막아야 했을 테고, 그 대책으로 군과 경찰은 물론, 국정원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했을 거라는 추리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어렵지 않았다.
대선 일주일 전인 2012년 12월 11일 밤, 개콘에나 나올법한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 김하영 씨의 그 유명한 ‘셀프감금사건’이 벌어진다. 대선 후보 간 마지막 TV 토론이 끝난 13일 밤 11시, 김용판 당시 서울 경찰청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김하영 씨 노트북에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무혐의로 종결지어 코미디로 만든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써,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작금까지 이어진다.
박근혜 정권에서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려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혼외 아들 의혹으로 사퇴하게 만들고, 국회 청문회에서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국정원 압수수색을 관철하려는 당시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은 현재 검찰총장으로 그가 했던 말대로 검찰조직 밥그릇 지키기에 여념이 없고, 경찰대학 교수의 공무원 신분으로는 하고픈 말을 다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표를 냈던 표창원 씨와 수서경찰서 담당 수사과장이었던 권은희 씨는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리고 선거기간 내내 박빙이었던 박근혜 후보의 지지가 문재인 후보를 앞서는 코로스 오버가 이날 밤 일어났다는 것이 선거 후에 밝혀졌는데, 이게 또 하릴없이 시간만 많은 룸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코미디가 통할 수 있지? 오히려 결과가 반대로 나타났어야 정상 아닌가? 그러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젊은 시절을 기억해냈고,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이의 정의감은 사소한 기준에도 쉽게 흔들린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과 공화당을 무조건 혐오하게 된 배경에는, 선거권이 생기는 스무 살 무렵인 1974, 75년에 걸쳐 있었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 백지 광고사태’가 있었다. 젊은 혈기로 정의감에 불탔던 시절에, 오죽하면 저렇게까지 언론을 탄압해서 진실을 은폐해야 유지될 수 있는 정권이냐라는 생각은 정권과 여당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나서, YS나 DJ를 모르면서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그쪽에 투표하도록 만들었다.
갑자기 할 일이 떠올랐다. 언론탄압을 자행한 유신 시대처럼 여론조작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정권이라면, 그래서 너희들이 국가조직을 동원해서라도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면,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하릴없이 시간만 많은 은퇴자로서 자발적 ‘댓글러’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침 7시부터 한두 시간을 할애했다. 국정원 직원 김하영 씨가 한 대로 젊은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아침 시간이 최적이었다. 첫 화면에 노출되는 세 번째 내의 댓글이 되기 위해 기사가 뜨자마자 달려고 노력했다. 어떤 댓글에는 수만 횟수의 ‘좋아요’와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2016년 4월의 총선부터, 그해 여름 국정농단으로 벌어진 촛불시위, 2017년 대선과 두 달 전에 있었던 총선까지 4년 동안, 만 번이 넘는 댓글을 달았고, 수십만 번에 이르는 ‘좋아요’와 ‘싫어요’를 눌렀다. 댓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횟수 제한을 초과했을 때는 네이버로 옮겨서 달았다.
그렇게 지난 4년 동안 자발적으로 일삼아 했던 댓글러 짓을 이제는 끝내야겠다. 끝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마태복음 22장의 예수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줘야 하겠지에, 태극기 부대처럼 추태를 부려서는 안 되겠기에 말이다.
<후기>
댓글에도 원칙과 요령이 있다는 것도 댓글러로 활동하며 배웠습니다. 제가 세운 원칙은 절대 반말이나 막말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탈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은 대부분 욕설에 가까운 막말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댓글에 달린 댓글은 가급적 열어보면 안 됩니다. 공감의 표현보다는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저주에 가까운 욕설이 많기 때문입니다.
댓글 표현은 짧고 강렬할수록 눈길을 끕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정부가 아무리 잘못해도, 이명박근혜에 비하면, 새발의 피요, 모기발의 나이키입니다’라는 댓글에는 재밌다는 찬사가 수백 개나 달리더군요. 모기발의 워커를 나이키로 살짝 비튼 겁니다. ‘이명박근혜와 닮아도 너무 닮은 도람뿌’라는 댓글도 찬사를 받았던 댓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감동의 결과를 주었던 총선도 두 달이 지나 기억에서 희미해졌습니다. 1년 전부터 기다렸던 총선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분석하는 이번 총선에서 여당 압승의 원인은, 외국 언론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국내언론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만, 그렇게 된 데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함없는 진정성에 있다고 봅니다. MB가 그렇게 원했던 국격이 이 정부에서 G20 정상회의 개최 없이도 완성되었습니다.
저는 전광훈 목사와 비슷한 나이지만, 그들이 싸잡아 비하하는 소위 '문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김어준 총수의 말처럼, 문빠가 되는 과정은 지극히 공정하고 나름 정의로웠습니다. 문재인 저 '운명'과 유시민 작가가 대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록 '운명이다'를 읽은 후,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상 하릴없는 룸펜의 쓰잘데없는 변(辯)을 마칩니다, 불편하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럴까 봐 서두에 경고 글을 올렸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