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데자뷔 이야기
아이의 기침 소리에 한껏 예민해진 상태로 묵주기도를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녘 잠시 깼다가 다시 잠을 청하고서야 깊은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제3자가 되어 꿈속의 나를 관찰할 수 있었다. 20년이나 어려져 대학생이 된 나는 참으로 생기발랄해 보였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첫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시험은 성적을 매기는 것이 아닌, 1등을 뽑는 공모전 형식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차분히 글을 써 내려갔다. 시간이 흐르고, 교수님을 중심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둘러서서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친한 친구와 나의 이름은 발표되지 않았고, 점점 심장을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 교수님은 앙 다문 입술을 천천히 떼며 이렇게 말했다.
"1등은... 축하한다! 김 OO!"
두 손을 포개 모아 입에 대고,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내 답안지를 받아 들었다. 내가 1등이라니!
그렇게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던 어느 날 아침, 등교 준비로 분주한데 입고 갈 옷이 없었다. 다급히 엄마를 부르자 진짜 엄마가 나타났다. 급한 대로 이 것이라도 입으라며 엄마가 내민 옷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칙칙한 회색 트레이닝복에 등에 큼직한 스마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맙소사!
바지가 엉망진창이었다. 무슨 자국인지도 모를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있었고 정강이 부분에는 피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지각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행거 한 구석에 걸려 있던 핑크색 셔츠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갈아입고 있는 사이 이미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고,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뛰어 강의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곧 현실로 돌아왔다.
'희한한 꿈을 꿨네'라고 생각하며, 늦잠을 자서 진짜 어린이집에 지각하게 생긴 아이를 깨웠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아이의 옷을 갈아입혀주고 있는데, 꿈에서 피가 났던 그 자리에 상처가 나있었다. 피까지 선명하게 맺힌 채로.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자 과거에 겪었던 데자뷔 현상이 하나 떠올랐다.
20대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긴 겨울도 끝나가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얼굴을 모르는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친근하게 포옹을 하며 인사를 했다. 의아한 얼굴을 하고 나는 물었다.
"누구세요?"
"너무해, 남자친구도 못 알아보고."
흰 피부에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였다. 목소리는 듣기 좋을 정도의 중저음이었다. 꿈 속이어서였을까. 그의 말에 나는 정말 그가 남자친구라고 쉽게 믿어버렸다. 그리고 유명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꽃비가 내리는 거리를 다정히 걷거나,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아침이 되어 꿈에서 깬 뒤 정말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연애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로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나는 어제의 그와 다시 만나 꿈속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꿈을 안 꾸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나는 종종 꿈을 이어 꾸는 경우가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꿈일 뿐이지만, 그저 그를 다시 만난 것이 기뻤다. 그날도 손을 잡고 어딘지 모를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거나, 한강의 벤치에 앉아 사이좋게 음료를 나눠 마시며 참 많이 웃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 꿈에서 깨어나기 싫을 정도였다.
셋째 날 밤이 되었을 때, 오늘도 그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진짜 꿈에 다시 찾아왔다. 흰 피부와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핑크색 니트를 입고 나타난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 폭 안겼다. 그 뒤로도 나흘간, 총 일주일 동안 우리는 꿈속 데이트를 이어갔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꿈에서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종종 꿈속의 그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럴수록 허전함만 더 커져서 이내 그만두기는 했지만.
겨울이 다 가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좋은 봄이 되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음악을 공부하겠다며 실용음악학원의 전문 프로듀서반에 등록하게 되었다. 개강일 당일, 파릇파릇 어린 친구들을 뒤로하고 가장 앞자리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업 시작 전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은 동그랗게 커져있었다. 꿈속의 그가 내 오른쪽 자리 끝에 눈을 반짝이며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첫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꿈은 꿈이고, 이건 현실이야. 끝없이 되뇌면서.
한 달쯤 지났을 때, 피아노 담당 강사님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좀 더 친해져서 음악적 교류를 많이 하라는 취지로 그룹을 정해 주고 연락처를 교환하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그와 나, 그리고 또 다른 여학생까지 세 명은 한 그룹이 되었다. 우리는 수업 시작 전에 학원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홍대까지 떡볶이를 먹으러 가거나 하면서 더 많이 친해졌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리던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친해진 이후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것은, 베이스 기타를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는 것과 첫 수업 시간부터 내내 나를 궁금해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그는 자주 연락을 해왔다. 소개팅 중간에 연락을 하기도 해서, 소개팅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니 집중하라는 이야기까지 했다. 음악적 교류는 뒤로 하고, 어느덧 소소한 일상생활까지 공유하게 되었지만 나는 그저 귀여운 남동생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프로듀서반은 토요일에도 학원을 가야 했는데, 피아노 레슨 시간이 앞뒤로 붙어 있어서 내 앞 순서인 그가 먼저 레슨을 마치고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그를 불러내 영화관으로 향했다. 정확히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마블 영화 중에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귀가 예민해 영화를 볼 때면 늘 한쪽 귀를 막아 볼륨 조절을 해야 했는데,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내내 웃으며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마주친 새끼손가락에 움찔하다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손을 꼭 잡고 영화를 봤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키가 작은 나를 꼬마 바라보듯 내려다보던 그의 눈은 사랑으로 빛났다.
그 뒤로도 1년 반의 연애 기간 중 1/3 동안,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사랑을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가슴 떨려했다. 그 정도면 심장병이라고, 농담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해 주는 그를 나 또한 참 많이 좋아했다. 꿈속의 이름 모를 그가, 현실의 이름까지 분명히 아는 그가 되어 마음을 나눌 수 있을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저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그가 꿈에서 봤던 그 핑크색 니트를 입고 왔을 때 나는 우리가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마도 절대 헤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사랑은 결국 빛을 잃어 퇴색되고 지저분한 감정들이 얽혀 끝이 나고 말았다. 한 때는 그를 지치도록 미워했지만, 이제는 그저 그가 행복을 찾았기를 바란다. 비록 변해버린 마음이었을지라도, 나에게 신기한 데자뷔 현상이었던 그가 나눠주었던 마음은 진짜였을 것이다. 한 때나마 그런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나 또한 현실의 현실로 돌아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아이를 위해 당근 머핀을 구우러 가봐야 할 시간이다. 진짜 꿈에서 깨어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