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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13. 2022

남겨진 흔적을 따라 몸과 마음을 이동해보며 1

장애-탈시설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공연 <관람모드-있는 방식>

 가을빛이 낭창했던 10월의 어느 날, 공연 <관람모드-있는 방식>에 '참석'했다. 공연을 '보았다'라는 단순한 표현이 있지만 고민 끝에 그렇게 쓰지않기로 한다. 공연의 제목처럼 이 공연은 관객에게 '그 현장'에 적극적으로 '있게' 하는 형태로 관람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은 그 현장으로 '이동'하는 일도 공연의 일부로 가져온다. 우리는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모여 버스를 타고 경기도 김포시 양촌의 향유의 집으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는 김동림 DJ의 진행으로 예매자에게 사전에 받은 신청곡들이 차례 차례 들려왔다. 어눌하지만 명랑한 그의 목소리가 농담을 던지면 버스 앞 스크린에서는 바삐 수어로 옮긴다. 한시간을 넘지 않지 않고 도착한 양촌의 외곽, 누런 들판과 면한 낡은 건물. 어떤 이들에게 한때는 세상 전부였던 시설이 그곳에 쓸쓸히 있었다. 운영진이 시설 현관의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덜컹, 하며 견고한 무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향유의 집'은 과거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이름으로 운영된 적 있던 장애인거주시설이다. 2008년 요양원을 운영하는 재단의 비리와 시설 내 인권유린 사건들이 문제화됐고, 이듬해 6월 더이상 견딜 수 없던 거주 장애인들 일부가 서울 마로니에 공원으로 나와 62일간의 노숙 농성을 벌였다. 이들의 투쟁 요양원의 운영진이 교체되고 현재의 향유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마로니에 8인'이 외쳤던 것은 '시설의 정상화'가 아니라 '시설의 폐지'였다. 이들은 줄곧 '장애인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하라'고 외쳐왔다.* 어쩌면 향유의 집은 사라지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인지도 모른다. 2018년부터 거주 장애인들이 하나둘 지역사회로 돌아갔고 2021년 4월 30일, 마침내 향유의 집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장애인의 탈시설과 자립을 위해 노력했던 시설 내외부의 노력에 의해 거주인 0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향유의 집이 '폐지'되었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 시설이 지자체 행정명령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을 닫게 되면 '폐쇄'이지만, 자발적인 결정과 실행으로 시설을 닫아 신고하는 것이 '폐지'이기 때문이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층과 층 사이를 연결하는 경사로 밑바닥에는 암호같은 숫자들이 적혀있다. 연도별로 시설에 있던 장애인 수, 사회로 돌아간 장애인 수, 직원의 수를 남긴 연대기다. 그리고 사망한 장애인의 수도.






<관람모드-있는 방식: 공연 소개 글>
우리는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 알 수 없는 혹은 알고자 하지 않는 거주시설에서 살고 있고 누군가는 그 시설을 방문합니다. <관람모드-있는 방식>은 없다고 여겨졌던 사람들, 하지만 분명히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기억, 흔적을 만나기 위해 지금은 문 닫힌 장애인 거주시설 ‘향유의 집’을 방문하는 짧은 여정입니다. 시설이 어디에 어떻게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있었는지를 바라보는 ‘관람’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또한 그 물음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시설이 없어져야만 있게 될 누군가가 있음을 함께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https://www.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1553)








 죽어있던 향유의 집의 문이 열리고 캄캄했던 내부에 빛이 들어왔다. 시설은 36년간의 운영을 마치고 폐지될 당시의 모습 그대로 멈춰있었다. 보통 7~8명이 함께 지냈다는 작은 방의 벽지는 손때로 누렇게 바래있었다. 두 방 사이에 있는 공동화장실은 문이 두 개다. 직원의 근무시간에 맞춰 짜여진 거주인들의 이르고(저녁식사는 오후 5시라고 했다. 직원들이 설거지까지 마치고 늦지않게 퇴근하기 위해서는) 짧은 식사가 배식됐다는 트레이가 복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시설에서 온전한 개인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이곳에 있었던 거주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고, 공간 곳곳에 그 흔적들의 의미를 더 깊이 가늠하게 하는 언어들이 보태어져 있었다.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보호자, 시설을 운영했던 직원, 이들을 인터뷰했던 활동가들의 고민까지. 벽지와 타일, 바닥에 단단하게 새겨진 목소리들은 공간과 맺는 관계를 다르게 배치해준다. 거주인들의 시선에 맞춘 글자를 읽어가기 위해서는 몸을 숙여야 하고, 넓은 행간과 비스듬히 휜 문장들은 눈과 발로 쫓으며 어떤 움직임을 체득하게 한다. 전시가이드의 설명으로 단체 관람이 이루어지기 전 개개인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순서 배치는 평준화된 앎보다 개별화된 몸과 감정으로부터 이 곳의 삶에 다가설 수 있게 했다.





향유의 집이 이미 폐지된 곳, 끝난 역사의 흔적이었기에 장애인거주시설의 '관람'이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사태의 비극성을 강조하려할 때 그 비극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보여주는 경향이 강하다. 가장 쉬운 재현이고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국제구호단체의 기부광고가 그렇고 방송에서 유족의 통곡이나 쪽방촌의 누추함을 다룰 때가 그렇다. 이런 방식에서 비극은 존재를 드러낸 (드러내기를 강요받은) 개인에게 묶여 모든게 '그'의 운명이고 '그'만의 불운인 것처럼 존재한다. 대상화된 비극은 수많은 비극이 유사하게 반복되는 구조적 측면에 무감하게 만든다. 만약 공연의 일환으로 사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겨진 거주인들을 향유의 집에서 보았다면 '탈시설'에 대한 나의 감각과 이해는 다르게 형성되었을거다. 아마 '그들'의 몸에 부착된, 개별적이고 고유화된 슬픔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이해가 옳지 않은 건 아니다. 분명한건 공터로 남겨진 향유의 집을 '관람'하면서 나는 개인적인 서사보다 더 확장된 공감각적 이해로 '탈시설'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건 어떤 이를 비극화하지 않는 형태로, 쉽게 타인의 삶을 전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른 시설의 문제들로 옮겨갈 수 있게 했다.


(계속)         







*'2021년 4월 30일, ‘향유의집’ 폐쇄되던 날', 비마이너 (2021.5.1) 참고

**'고용승계 38%, 향유의집 시설폐지의 그늘', 비마이너 (20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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