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이 낳은 그림들
그림에는 자신들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반영된다. 예술 분야 진로를 택하게 된 것도 그림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보편 언어 (universal language)라는 매력 때문이었다. 한 술 더 떠서 톨스토이는 소통과 공감의 성공 여부만이 예술품의 가치를 규정하는 유일한 잣대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말 그림을 통하여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류의 대화가 가능하긴 한 걸까?
가능하다는 가정 아래, 우리는 또 질문을 던져본다. 도대체 무엇에 관하여 소통해야 한단 말인가? 동시대 바로 옆집 사람과도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지 않은 우리들이 말이다. 언뜻 단순한 듯 어려운 문제의 답을 위한 실마리로 이 그림들을 봐보자. 우리의 눈에 익숙한 세련된 테크닉과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거칠고 투박하고 다소 살벌하기까지 한 강한 여운을 남기는 그림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박물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참혹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그림을 탈출구로 삼은 사람들이 있었다. 위의 두 그림은 기약 없이 죽음의 공포에 대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수용소의 포로들이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박물관용 그림을 의뢰받았을 때 몰래 그린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어떤 글이나 영화보다 솔직하고 생생하다.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지만, 적어도 이 그림을 몇 분이고 응시(감상이라는 표현조차 사치로 느껴졌기에)하는 동안만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의 고통과 절박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소통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상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그런 영상 매체들의 대세 속에 어쩌면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예술의 감동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