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아나운서' 떼고, '다시, 나로' 홀로 서기 위한 자발적 방황기
"그 좋은 직장을 왜 나온 거야?"
요즘도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억대 연봉,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회사,
정규직 아나운서가 점점 귀해지는 시기에
남들이 말하는
편하고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회사를 나온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15년 전의 어떤 다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그냥 씩 웃으면 말한다
"밖에서 보니, KBS가 가라앉는 배 같았거든요"
나는 얼마 전까지
KBS라는 아주 좋은 배를 타고 있었다
우리 미디어 시장을 바다에,
방송국과 각종 미디어를 배에 비유했을 때
KBS는 그 어느 배보다도 크고 튼튼했다
국가 기간 방송사로서
시스템과 규모, 인력 운영의 노하우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방대한 아카이브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KBS의 자랑이었다
KBS라는 배에 타고 있으면 참 편하고 든든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KBS라는 배 안에서, 구성원들은 믿고 있었다
'우리가 최고다'
가끔 보게 되는 다른 배들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고,
그들은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고 믿었다
적어도 자신이 '퇴사'할 때까지는 괜찮다고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딱, 신입사원 때까지는 말이다
편안함이 주는 환경과 혜택 속에서
앞만 보며 열심히 일을 하다가
KBS 남자 아나운서 최초로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육아휴직이 시작됨과 동시에
법인 명의의 휴대폰은 개인 명의로 바뀌었다
처음으로 KBS를 떠나
시청자로서 KBS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KBS 프로그램을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사실 KBS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진행하는 방송은 거의 생방송이었으니,
내가 내 방송을 볼 일도 별로 없었다
모니터나 의무감에 본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내 생활 속에 KBS는 없었다
그리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와
공정방송을 사수하기 위해 긴 싸움을 하던 때,
방송을 멈추며, 시청자에게 불편을 드리면서까지
우리가 정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던 거였다
그러나, 정작 시청자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KBS도 파업해요?"
6개월이 넘게 방송을 멈추고 있는데
거리에서 만난 시청자의 한 마디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전단지를 들고
우리 얘기를 전하고 있는데
시청자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방송이 멈춰있는지 조차
우리가 바란 응원과 지지도 아닌, 철저한 무관심
이게 우리를 더 힘들게 하고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때 눈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니
'아직까지는 괜찮다'라고 말하던 선배들도
더 이상은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KBS도 파업해요?"
우리는 방송을 멈췄는데
정작 시청자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KBS라는 배에서 내려서
미디어 환경을 바라봤던 때가 생각났다
시청자의 눈으로,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본 KBS
넓고 넓은 미디어의 바다에서
KBS는 가장 크고 튼튼한 배였지만
쉽게 찾게 되지 않는 방송이었다
너무 어려웠고, 너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