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고 싶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수많은 말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이다. 일요일 오후부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길 바라고 출근 전부터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매 순간 집에 가고 싶다. 일정을 위해 외출할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충전기를 뽑은 전자기기처럼 서서히 방전되어가는 나를 볼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출을 위한 계획과 준비를 하는 과정부터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문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저전력 모드로 생활하며 방전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동하는 길에도 사람, 교통수단 안에도 사람, 일하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피곤함이 쌓여서 머릿속에는 온통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계획에도 없던 일정이 생기는 날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내 계획과 마음처럼 되지 않기에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몸을 움직인다. 어떻게 모든 것을 내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겠냐며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집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가끔은 신발장 앞에 널브러져 있기도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여는 순간부터 충전기에 연결된 휴대폰처럼 서서히 살아난다. 바깥공기에 섞인 피로와 부담감을 씻어내고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으면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피곤함이 섞인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불 위로 몸을 굴리면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긴장되었던 근육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다.
누구보다 집을 좋아하기에 재택근무는 나의 목표이자 오랜 희망사항이었다. 온전히 집에만 있을 수 있는 날을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이었다. 바이러스로 전 세계의 일상이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 말이다. 팬데믹 시대. 한순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두가 멈췄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사회적인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언제나 복작거리던 거리는 한산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조금씩 움직임이 보이더니 온라인 문화가 발달하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잃은 것이 있는 반면, 얻는 것과 발전이 있다. 물리적인 활동 범위는 좁아졌지만 활동 공간은 다양해졌고 온라인으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내 방은 회사가 되고, 카페가 되고, 모임 장소가 되었다.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즐겁기만 할 것 같던 생활은 형용하기 어려운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집에 있지만 더 이상 안도감과 온전한 해방감을 느낄 수 없이 갑갑한 생활이었다. 일과 생활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내 방의 어느 곳에서도 편히 숨 쉴 곳은 없었다. 분명 집 안에 있었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몸을 누이고 쉴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집이라고 여겨왔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공간의 개념을 넘어 심적인 안정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로 바깥 활동하며 살아갈 때는 내 방과 집이 안식처가 되어주었지만 집안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온전한 휴식을 하기 어려워졌다. 일정한 공간에 머물며 좋은 기억을 쌓아가기도 하지만 괴로움과 고단함도 함께 늘어간다. 그런 이유로 자꾸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사람이 완벽한 휴식을 위해서 집을 떠나는 이유는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 했던 말이 이해가 된다. 할 일이 보이는 곳에서 몸은 쉴 수 있어도 마음까지 쉬기는 어렵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특정한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고 있을 수 있는 어딘가를 찾는 게 아닐까 싶다. 마음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집이 주는 안락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차 안이나, 자주 찾게 되는 카페, 게임 속처럼 온라인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옆이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다. 긴장을 풀고 있을 공간이 더 많아져서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집이 늘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