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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소대나무 Sep 28. 2020

사과와 표현

사과와 표현




“00상, 너만은 제발 와주기를 바란다. 교통비는 내가 다 줄게. 내 결혼식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난 끝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철야에 주말근무를 감행하며 다른 것들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던 그 시기, 일본행 비행기 표사기부터가 스트레스였고 일본에 당도해 나가사키까지 혼자 가는 법을 구상할 에너지조차도 모조리 고갈되었다는 것이 내 항변이었다. 중국인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고지식한 아버지와 의절한 탓에 코지는 자신의 인륜지대사에 가족과 친척도 초대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나가사키현 바다가 보이는 한 신사에서 그는 친구 몇 명만이 참가한 가운데 쓸쓸하게 언약을 맺었다. 


우리는 술친구다. 코지는 동아시아 최고의 조각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홍안의 청년이었다. 그는 조각과 회화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싶다며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같은 층을 썼던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술자리를 가졌고 이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모종의 사업을 꿈꾸던 중국 길림의 야심가 박영호와 방글라데시 귀족출신이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의 색정광이었던 무하마드 엘판도 함께였다. 넷은 국적도, 전공도, 취미도 각기 달랐지만 ‘술’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돈독한 우정을 만들어갔다.

이들이 꼽은 한국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바로 ‘막걸리’였다. 코지는 막걸리의 입안을 감치는 첫맛과 제법 칼칼한 목 넘김, 그리고 쌉싸래한 끝 맛이 사람의 인생과 닮아있다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괴짜기질이 있던 코지는 ‘대한민국 막걸리 연구소장’을 자처하며 자신의 기숙사 방을 근거지로 ‘막걸리 연구소’를 설립했고 나머지 친구들을 막걸리 연구 행동대원으로 위임하는 리더십을 보이기도 했다. 

때는 2000년도 초중반이었고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F4’열풍이 불고 있었다. 우리는 ASIA의 4인방이라는 의미로 ‘A4’라며 스스로를 일컫기도 했다. 전공도, 수업시간대도 달라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기 힘들었지만 우린 기숙사내에서 늘 함께하며 이색적인 추억을 만들어갔다. 해외경험이라곤 섬에서 군 생활을 했던 것이 전부였던 시골 무지렁이가 무슬림(방글라데시)의 문화와 라마단에 대해 이해를 하고 길림성의 증국 동포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 대해 깨닫는가 하면 매일같이 일본식 다도(茶道)를 경험할 수 있었으니 그들과의 교류는 어쩌면 막걸리 한 병 값으로 ‘글로벌 감각’이라는 고스펙을 쌓을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였다. 

술이 불콰하게 돌면 ‘우리 4명이 20년 뒤 동아시아의 경제력을 정복할 것이다’며 치기어린 호언을 던지기도 했는데 그 장담들이 무색하지 않게 우린 각자 전공을 살려 제갈 길을 찾아갔다. 엘판과 영호는 글로벌 기업에 취업을 했고 코지는 나가사키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예술 꿈나무를 양성하는 동시에 아시아의 신흥예술가로 주목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가고 있다. 바쁜 삶을 핑계로 한 시절 잠깐 연락이 끊긴 적도 있지만 우리는 모바일 메신저로 연락을 취하며 여전한 우정과 의리를 확인하고 있다. 

언어도, 전공과 나이도, 종교적 제약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각기 달랐지만 우리가 이렇게 돈독한 우정을 이어갈 수 있는 건 다양성의 존중에 있다. 과거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면 이따금씩 한·중·일 특유의 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언성이 높아지거나 다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슬림이었던 엘판이 라마단기간에 온몸의 털을 밀고 동쪽을 향해 절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보며 그 ‘행위’를 비하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도 없었으며 일본인의 질서에 대한 강박과 소황제로 자라난 중국인의 생각에 대해 반감을 크게 가진 적도 없다. 학생 특유의 순수한 시선으로 선입견을 배제한 채 서로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것은 굉장히 오묘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초반부에는 문화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서로 제법 실수를 했었다. 이를테면 조선족에게 국적을 물어본다거나 무슬림에게 돈가스를 권하고, 일본인에게 질서에 대한 강박관념을 물어보는 것 등이다. 이런 실수가 있을 때면 당사자는 그 즉시 사과를 했고 상대방은 오해 없이 그 사과를 받아줌으로써 갈등을 길게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소했다. 

최근 ‘경제왜란’으로 일컬어지는 현대판 한일전쟁으로 신문지면이 뜨겁다. 일본은 지난 과거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아끼고 있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한국의 원성을 섬나라 특유의 뚝심으로 삼켜내고 있다. 어린 우리(A4)도 그러지 않았는데 그들의 미성숙함은 근 백년을 이어오며 더 심화되어가는 느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 몇 푼의 보상금이 아니라 과거 실수에 대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과인데 그 명명백백한 과거를 인정하고 예를 표하는 것이 그렇게나 힘든 노릇일까?

7월말이면 영호와 코지상이 약 1주일의 여정으로 한국을 온다. 내한 목적은 역시나 막걸리다. 막걸리를 통해 그간 쌓인 심신의 피로를 풀고 삼복더위를 물리칠 정력을 얻는다며 그들은 이른바 ‘막걸리 보약론’을 펼치고 있다. 그들에게 막걸리 이외의 근사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난 남해 해변가의 근사한 펜션을 잡아두었다. 지난여름에 이어 1년 만에 만난 우리는 막걸리와 함께 그 사이 켜켜이 쌓아둔 얘깃거리를 나누며 회포를 풀 것이다. 코지상이 외딴 신사에서 쓸쓸히 평생가약을 맺게 한 것은 못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그는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하지만 그 자리에서 

박수쳐주지 못한 것이 끝끝내 신경이 쓰여서 이번 한국여행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준비해보려 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멋진 A4,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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