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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소대나무 Sep 29. 2020

노고단 가는 길


노고단 가는 길     



“부장님은 근무하신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이십 년.”                    


   단문으로 오고가는 대화가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서 십 년차 과장의 입김이 이십 년차 부장보다 더 세었기 때문이다. 부장은 K자동차, 과장은 H자동차 출신이다. 부장은 좌초된 기업에서 어쨌거나 자리를 보전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 중반, 청운의 꿈을 안고 내가 입사한 회사는 엔진, 변속기를 주력적으로 생산하던 K자동차의 핵심계열사였다. 90년대 초반에는 봉고, 프라이드 신화를 일으키며 대단한 사세를 뽐내기도 했으나 몇 년 뒤 몰아닥친 외환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부에서는 자본잠식에 빠진 K자동차를 외국 자본에 매각하려고 했으나 국민기업을 헐값에 빼앗길 수는 없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에 언감생심 생각지도 않고 있던 H자동차가 K자동차를 인수하게 되었다.      

      기계 제조분야에서 서로가 최고라고 추어대는 두 기업이 한 지붕아래에서 살게 되었으니 초반에는 서로간의 자존심 경쟁이 대단했다고 했다.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H자동차는 그들의 기업문화를 강요했고, K자동차 잔류병들은 차량 제조기술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세우며 이에 응수했다.      

      회사에서는 물과 기름을 섞기 위해 회사 ‘밖’에서 땀을 흘릴 것을 권했다. 함께 스포츠를 즐기며 호흡을 나누는 동안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날선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겠느냐는 의도였을 것이다.      

      회사에서 추진한 스포츠 종목은 탁구, 마라톤 그리고 산행이었다. 부서 간 대항전이 벌어질 때면 그 경기 양상이 실업팀에 버금갈 정도로 열기가 달아올랐고, 이에 ‘화합과 상생’이라는 기치가 무색해지는 역효과가 나기도 했다. 무한 경쟁 시대에 승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샐러리맨에게 ‘패배’란 곧 퇴출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해, 창립기념일, 목표 매출을 달성한 날 등의 특별한 시기가 되면 도심을 벗어나 단체로 지리산을 오르기도 했는데 산행은 유일하게 참여자들이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던 종목이다.      


      5월의 이른 햇살이 때아니게 무더웠던 여름날이다. 지리산 노고단을 향해 한 시간 가량 올랐을까. 서서히 동질감을 느낄 법도 한데 과장과 부장의 대화는 아직까지 건조하기 짝이 없다. 과장 역시 상대가 궁금해서라기보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질문을 던졌기에 더 이상 물어볼 거리가 없어 보인다. 그마저도 부장은 심드렁하게 답변했으니 탐색전을 더 이어가기 민망했을 수도 있다. 형식적인 질문이 몇 마디 더 도는가 싶더니 나에게 질문의 포화가 조준된다.      

      두 회사의 정통 핏줄이 아닌, 이미 합병된 지 6년이 지난 후 입사한 나는 그들에 비하면 ‘회색분자’에 가까운 정체성을 띄고 있었다. 아빠가 H자동차라면 엄마는 K자동차라고 볼 수 있을 터, 부부싸움 후 어색해진 공간을 메우는 데는 자식들의 재롱만큼 좋은 것이 없다. 고향 소개부터 연애 사업, 입사 소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어느덧 휴식시간이 끝나간다.                              

      “김과장, 발목은 왜 그래? 데인 적 있어?”     

      “어렸을 때 미역국을 쏟았어요.”     

      “나도 어렸을 때 뜨거운 물을 쏟아서 발목이 쭈글쭈글해.”                     


      앉은 자리에서 배낭을 뒤적이던 김과장의 발목을 보더니 부장도 바지를 걷어 똑같은 자리의 상흔을 보여준다. 시골에서 우물물로 급하게 상처를 식혀내고 읍내 병원으로 달려간 이야기, 흉터 때문에 놀림 받았던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대화에 생기가 띤다.      

      “이 상처가 처음엔 참 밉더라고. 여름에 반바지도 안 입었어.” 개구진 또래들의 놀림에 상처를 받은 부장은 클 때까지 남에게 보여주길 꺼렸다고. 그러다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한여름에 반바지도 못 입나 싶어서 에라이 그냥 드러내자하며 상처를 밖으로 드러낸 순간 마음의 멍이 ‘작은 상처 따위’가 되었다고 했다.      

      “저랑 똑같네요. 저도 반바지를 잘 안 입었어요. 어릴 땐 참 이게 왜그리 부끄러웠는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길가에 풍성하게 가지를 드리운 고목이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물하고 무성한 수풀 사이로 이름 모를 산새 지저귀는 소리에 귓가가 청명해진다. 그토록 옭아매던 사회의 지위, 소속감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과 주변을 있는 그대로 둘러볼 수 있게 하는 여유. 그래서 우리는 앞에 大를 붙여 대자연이라 표현하는 걸까. 지리산 깊숙한 숲에서 불어나오는 초여름 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내는가 싶더니 몸이 제법 찹찹해졌다.                     


      고목 아래서의 달콤한 휴식을 계속해서 즐기기엔 남은 여정이 길다. 엉덩이 탁탁 털어 다시 길을 나선다. 야트막한 굽이길 몇 개를 오르내리고 나니 다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제법 가파르고 긴 오르막이 눈앞에 펼쳐진다. 기죽지 않으리라. 우리는 이 오르막을 단기목표로 잡고 오름 정상에서 두 번째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부장이 얼음물을 꺼내 과장에게 건네준다. 과장은 물병을 말없이 받아들어 두어 모금 마시더니 다시 내게 건네면서 한마디 던진다.      

      “자~ 우리 다시 한 번 올라보죠.”     

      얼음물 한 모금 들이켠 나는 그들에게 뒤질세라 총총거리며 뒤를 좇는다. 따사로운 5월의 햇살을 맞으며 우리 셋은 다음 휴식지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흙은 거칠고 길은 험해지고 있다. 산행은 이제부터가 진짜 게임이다. 적당히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 숲의 바람이 청신하기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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