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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i were there Apr 06. 2022

봄, 보다의 찰나형

[04]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 - 하동 쥐 편

[편집자주]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는 서울 쥐와 하동 쥐의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띄고 있다. 한 번은 서울쥐의 편지가, 그다음 주에는 하동 쥐의 편지가 실릴 예정이다. 하지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 편지가 각자 이야기만 늘어놓는 푸념이 될지도 모른다. 둘 다 지역을 위한 연구 및 실행을 수행하며 살다, 서울 쥐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하동 쥐는 지역 현장에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둘의 푸념들이 여러 청년(혹은 중년)들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서울 쥐는 브런치에, 하동 쥐는 블로그에 이 이야기들을 함께 게시하고 있다.


네 번째 글은 하동 쥐의 이야기다.






좀 느끼하더라, 구어체로 글을 쓰는 너인데
상당한 문어체를 사용한 것이 뭔가 간질거렸어


라는 말에 웬 지적질이냐고 반문하더라? 

그래, 그러고 보니 공감 이전에 지적질이 우선인 나는 꼰대로서의 주체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구나 싶더라.


웃자고 하는 말에 진지하게 접근해 볼까 해! 나야말로 혼란에서 허우적대는 엉망진창 결론에서 이제 그만 헤어나고 싶거든! 사적인 영역에서는 공감이 선행되길, 공적인 영역에서는 비판이 우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어. 내가 만든 나만의 편견에 뒤집기를 해봤지. 너와의 관계를 공적으로 접근해서 비판을 앞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공적인 관계를 겨우 인간 간의 교류라는 이름으로 공감 영역을 우선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공감과 비판이라는 상대적인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순 있지만, 어떤 메커니즘으로 한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게 되는지, 매번 나를 의심하고 다시 돌이켜 볼 뿐이야. 그 쓸데없음이 쓸데 있음으로 변화할지도 모른다며 멍청한 짓을 이어갈 요량이고.


네가 화났다던 타인의 격리 통지서를 받았던 일화를 생각해 보았어. 타인의 통지서를 네가 수령했던 것은 분명 행정의 실수였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불쾌한 일이구나 싶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분명한 개선이 이뤄져야겠지만, 그것이 공공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확대하는 것으로만은 충분치 않은 것 같아.


사회 시스템의 복잡도가 올라가고, 개개인의 요구는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공적 시스템이 모든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실이 아닐까? 결국 시스템이라 함은 무한의 다양성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 유한의 다양성, 달리 말하면 획”일”(?) 성까지는 아닌 획”유한”(?) 성을 전제하고 있구나 싶어.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일 판단의 유연함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복잡다단한 경우의 수에 대한 해법을 칼로 자르듯 법률과 규정에 의해 어떤 판단을 가지는 것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구나 싶어. 고전들이 말하는 사회의 흥망성쇠에 따른 통치 방식 중 법치에 해당하는 건 아닌지 얕은 지식에 덧대어 보게 되네. 사회가 혼란스럽고 쇠락해 갈수록 강력한 법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가 주류로 자리 잡고, 사회가 흥할수록 덕을 기반으로 한 통치, 심지어는 주민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더라도 선의에 의해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선을 긋고 그 선에 조금이라도 넘치거나 모자라면, 잘잘못을 가르는 상황이 지속되고, 사람들의 예민함이 날로 늘어 상호 간의 신뢰는 어느새 무너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건가 싶어.


우리가 너무 날을 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얼버무림이 아니라, 책임과 권한에 대한 명확함을 강조하면서 그 일을 행하는 이들, 즉 사람의 불완전성에 대한 지점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애초에 모순인 것들에게 완벽하지 않냐고 채근하는 느낌이 계속해 드는 건 뭘까? 이런 판단을 하는 내가 나이브해서 더 이런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걸까?


고민하지 않은 고민은 고민이 아니다 싶어. 돌고도는 질문에 계속해 질문을 던지면서 질문을 찾고 답은 아닐지언정, 문제의 원인까지는 발견하고 싶고 말이야. 혼란의 어딘가 즈음이구나 싶어.

시스템을 이용해서 통지서를 발송하고 후 절차를 진행한다고 하지만, 결국 어딘가의 지점에서는 그러한 개인 정보를 입력하는 인간의 손에 의해 직접 행해져야 하는 행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봐. 그렇기에 불완전성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고 말이야. 서울, 수도권의 엄청난 메가시티화에 결국은 그러한 문제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이야.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야 하는 것도 필요할 테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일도 필요할 테고! 참으로 힘든 난관에 봉착한 우리 같아.


그럼에도 여기 하동, 화개엔 벚꽃이 만발했어. 만개한 꽃이 어느새 낙화하는 모습은 직관하면서, 이런 질문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그저 흩날리는 꽃잎에 혼을 빼앗긴듯싶기도 하고 말이야. 저 멀리 산을 보면 하얀 꽃과 이제 막 싱그러운 초록을 뿜어대는 나무, 겨우내 담고 있던 짙은 초록이 산이라는 형태에 잘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우리가 순간의 찰나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해.


비슷한 시기에 코로나에 확진되면서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참 아이러니해. 질병 이후에 후유증이라는 것을 처음 겪어. 처음이라 함은 어쩌면 우리가 장년층으로 접어들면서 가지게 되는 첫 경험은 아닐까 싶기도 해. ‘진(기력)이 빠졌다, 머리가 멍하다, 기침이 많아서 가슴이 아프다. ‘ 이런 증상이 내 나이를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던 듯도 싶고 말이야.


더 웃긴 건 말이지. 나 꽤 많이 울었어.

울고 싶어서 드라마를 본 것인지, 드라마를 보면서 감성이 터져서 울었던 것인지 무엇인 우선인지는 모르겠는데, 격리 5일 정도 지나서 이제 몸이 회복되었구나 싶은 그 상황에 본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3일 정도 몰아보면서 어찌나 많이 울었던지 그 3일간 눈이 퉁퉁 부어 있었거든. 어쩌면 눈물이 후유증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어.

드라마 속 남주, 박동훈이 삶을 대하는 수동성이 어쩌면 살아냄의 가장 능동적 형태는 아닌가 싶어.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누군가는 드라마가 어둡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보다 더 희망적이고 밝은 드라마가 어디 있냐며 반문하는 나를 발견하고 있기도 했었거든.


완연한 봄이야. 항상 피어나는 꽃임에도 그 피어남에서 새로움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꽃을 볼 수 있는 찰나였어.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보내고 이제 그 아름다움을 날려 보내며, 싱그러운 초록을 보게 될 찰나를 또 기다리고 있어.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이 피어나지만, 꽃이 피어나기 위해 열매를 맺기도 한다는 생각이 더 맞다 싶은 지금이다.


우리 이 봄! 봄! 이 찰나를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여전히 가내 안녕하길! 봄의 완연함에 잠시 고민을 잊거나 잃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을 듯해. 건강 잘 챙기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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