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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Nov 17. 2021

적도의 크리스마스

첫눈 말고 팡코르섬


삼, 육, 구똑같다. 인간적으로 육구, 삼육! 는 올록볼록 강약조절해야 제맛이다. 우리나라 계절이 꼭 그렇다. 말레이시아의 3, 6, 9월은 비인간적으로 일관성이 있게 어제도 덥고 오늘도 덥다. 땀에 젖은 몸을 꿉꿉하고 두툼한 습기로 돌돌 말아주는 이곳의 낮 기온은 늘 삼십 도를 맴돈다. 우기와 건기가 있다는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삼 년째 궁금해하는 중이다.


12월은 사정이 좀 다르다. 하나둘 들리는 우리나라 추위 소식 추억 여행을 떠나기가 수월해진다. 한국의 이맘때를 떠올리면, 입김 나오는 날 커피를 감싸던 손끝의 감촉이 살아난다. 톡톡한 외투와 칭칭 싸맨 목도리로 싸늘한 공기를 맞학교 캠퍼스 스쳐 간다. 추위를 털어내듯 부산을 떨며 들어간 선술집에서 김이 솔솔 풍기는 사케 노곤하게 몸을 녹이던 퇴근길 떠오른다.


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져 창문을 열었다. 아뿔싸, 훅 불어닥친 열기에 서둘러 에어컨 바람을 찾았다. 인지부조화에 빠진다. 아, 이 말을 빼먹었다. 12월에도 말레이시아 어김없이 삼십 도를 넘는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는 유례없는 불볕더위, 아프리카 대프리카, 잠 못 드는 열대야의 기사들로 덜 외롭게 하더니 홱 돌아서려고 그랬나 보다. 날씨가 서늘해졌다는 뉴스에 이어 기어코 첫눈 소식이 들려왔다.






유니콘, 해태, 봉황, 플레이스테이션, 클럽, 요정, 산타, 소개팅, 불사조, 올나이트, 둘리, 호잇, 날렵 턱선, 인기남, 첫눈. 이 생뚱맞은 나열에서 찾을 수 있는 의외의 공통점은 모두 내 상상 속으로 사라진 존재라는 것이다. 개중에는 한때 실존했지만 고마운 줄 모르고 당연한 듯 즐기던 것도 끼어 있어 씁쓸하고 아쉬운 뒷맛이 자꾸 남는다.


첫눈 말이다, 첫눈.


겨울 없는 나라에서 십 년을 살았다. 말레이시아로 오기 전 칠 년간 머물렀던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노스리지(엘에이 인근 도시)는 아무리 추워도 결코 영하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12월이 오면 사람들은 어그부츠를 신고 세상 두꺼운 파카를 입으며 얼어 죽네 하던 웃기지도 않는 곳이었다. 여전히 영상인데 한파가 닥쳤다며 진짜로 얼어 죽은 사람이 발생했을 때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급격한 추위에 삼 일간 몸살을 앓고 나서야 한국의 겨울을 이 몸뚱이가 잊어버렸구나, 생각이 들어 서글프기도 했었다.


그곳을 거쳐 도착한 이곳의 연평균은 이십칠 도에 육박했다. 더위를 씻어주는 시원한 비가 온종일 내릴 때를 빼고는 덥거나 더 덥거나 둘 중 하나였다. 첫해에는 일 년의 막바지를 호호 불던 손으로 준비하던 습관이 남아 있던 때라, 느닷없이 한 살을 더 먹은 걸 깨달은 어느 날 아내와 부둥켜안고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있다. 외국이니까 생일이 지나야 한 살을 먹는 거야, 따위로 희망을 연명하던 시절은 오 년 전에 지났으니 이제는 될 대로 돼라 싶다. 이쯤 되니 첫눈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옛날 한국에 살 때 말이야…'라고 시동을 걸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한 해를 보낼 상징 같은 걸 찾기로 했다.


- 우리, 말레이시아에서 맞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팡코르 Pangkor 아일랜드라는 데 가볼까?

- 거기가 어디야?

- 차로 세 시간 정도 가는 곳인데, 사람도 없고 한적 하대.

- 오, 사진 예쁜데? 해변도 있으니까 우리 딸 놀기에도 좋겠다!


그렇게 세 시간을 운전하고 삼십 분간 배를  뒤 도착한 곳은 팡코르라는 작은 섬마을이었다. 녹슬고 마감재가 뜯어져 속이 훤히 드러난 소형 승합차로  시간 이내에 구석구석 구경할 수 있었으니 확실히 기는 아담했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맞은 낡은 집들과 목재를 어지럽게 쌓아둔 목공소가 에헴 하며 나타났다. 목공소 너머로 넘실거리는 바다를 낀 부두가 보였는데, 어쩌면 배를 수리하는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두에는 삼 층 짜리 집을 얹은 모습의 어선들이 빨강, 노랑을 곱게 칠하고 둥실둥실 정박해 있었다. 배 위의 집에서 늘어진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어푸어푸 세수하는 선원의 모습이 보였다. 출항을 기다리는 알록달록한 배들이 바다 위 선명하게 도드라진 이국적인 어촌 마을이었다.


기대처럼 바닷가 모래사장은 한적했다. 놀러 나온 동네 꼬마들과 간간이 보이는 외부인이 섞여 나른한 풍경을 만들었다. 순두부가 연상되는 몸뚱어리나 세상 빛을 접한 적 없는 아련한 복근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낡아빠진 트렁크 수영복을 걸치고도 거드름스럽게 앉아있으니 캘리포니아 말리부 비치보다 빠지는 게 없다. 뒤로 크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밑에서 모래를 조몰락거리며 요리하는 딸을 보고 있으니, 크리스마스 첫눈의 설렘 왠지 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늦은 저녁, 해변가에 테이블을 둔 레스토랑을 찾았다. 맨발 위로 고운 모래를 뿌리는 딸의 장난에 발가락이 간지러웠다. 지척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촤아,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낭만적인 조명이 비추는 평온한 밤바다였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레스토랑이 진행하는 거대한 과자 바구니 추첨 행사에서 우리 가족이 주인공으로 뽑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테이블에서 아른거리는 예쁜 촛불, 귓가에서 퍼지는 파도 소리, 발을 간지럽히는 고운 모래가 어우러진 적도의 크리스마스였다.


- 여보, 팡코르진짜 근사하다.

- 우리 크리스마스 때마다 여기로 올까?


그 후로 두 번을 더 왔다. 꼭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건 아니었지만, 말레이시아로 놀러 오신 어머님과 작은 처형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해변에 여유롭게 자리를 잡은 뒤 아내가 어머님께 말했다.


- 엄마, 여기 진짜 예쁘지.

- 그쵸, 어머니? 너무 평화로워요. 우리 앞으로 자주 놀러 ㅇ... 여보! 어머니 어디 계셔?? 어디로 가신 거야?


갑자기 사라지셨다. 좀 전까지 곁에 계셨는데.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때, 일흔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모래밭을 질주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넋이 빠진 채로 엄마의  행동을 바라보는 아내가 있었다. 잠시 후 손에 뭔가를 들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돌아오시는 어머님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아내와 나 그리고 작은 처형이 바라보고 있었다.


- 얘들아, 이것 봐라~ 게 잡아 왔다~


일흔의 어머니를 전속력으로 질주시켰던 것은 모래밭에 사는 손바닥만 한 게였다. 맛조개, 바지락 등 바닷가에서 채집하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하셨던 터라 멀리서 꼬물거리는 게를 보시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으셨다고 했다. 그 길로 어머님과 내가 잡아들여 라면 속으로 사라진 게가 열댓 마리 넘었는데, 게들 사이에 주의보가 퍼졌는지 다음날부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게들이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오지도 가지도 못하던 시기, 메신저로 일본인 친구와 이야기하다 우연히 팡코르섬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눈이 번쩍 뜨일 소식을 전해준 건 그다음이었다.


"팡코르에 사는 현지인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거기에 오징어가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장소가 있어."

"배 타고 섬에서 더 들어가는 거야?"

"아니, 해변 근처에 낮은 바위가 있는데, 낚싯대만 던지면 오징어가 줄줄이 나와. 걸어가는 곳이야."


이어 보내준 사진에는 팔뚝만 한 오징어가 낚싯대에 매달려 있다. 옆에 있는 꼬맹이가 들고 있는 작은 낚싯대에도 오징어가 대롱대롱 매달린 걸 보고는 즉시 인터넷 쇼핑으로 장비를 주문했다. 옳다구나, 이번엔 오징어잡이다!


로부터 창고에서 낚싯대가 썩어간 지 일 년이 흘렀다. 하지만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유튜브를 통해 오징어 낚시법도 완벽하게 숙달해뒀고, 어머님만 오시면 곧장 팡코르섬으로 갈 작정이다. 잡은 오징어는 회로 먼저 썰어 먹고, 무침을 한 뒤, 튀김으로도 먹은 다음, 남은 건 얼려뒀다 집으로 가져오는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 한 마리는 그래도 잡을 수는 있겠지…?

- 그럼, 문제없지. 내가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허당 같은 계획이라 생각했는지 아내가 의심에 찬 말을 했다. 유튜브로 익힌 오징어 유인법을 재연하며 낚싯대를 허공에 휘휘 보란 듯 흔들었다. 이제는 늠름하고 듬직하게 보이겠지? 스스로 꽤 멋스럽다고 느껴져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쓸어 넘겼다.


크리스마스와 첫눈의 설렘을 자연스럽게 메꿔준 팡코르섬을 한 해의 마지막 즈음에서 또 기다린다. 유명하지도 멋지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즐겁고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다. 혹시 팡코르섬에 관한 내용을 다음에 또 쓸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라면 속 면발보다 오징어가 더 많아서 먹기가 힘들었다는 둥, 오징어에 질려서 이제는 거들떠도 보기 싫다는 둥 자랑하는 글과 사진으로 도배가 될 텐데 이를 어쩐다. 자랑하는 건 딱 질색인데. 걱정이 태산이다.




<Cover photo by JillWellington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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