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하는 하와는 도처에 있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82035025&code=990100
좋은 칼럼을 읽었다.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그만큼의 실망이 읽힌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본질은 나라의 거들짝인 여자 대통령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의 이름이 전면에 거론되면서
여성성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여자 대통령은 절대 안 나올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끄러움은 왜 여성의 몫이어야 하나.
칼럼 제목처럼 하와는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도처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하와는 매일 실수도 하지만 자기를 반성하며 살아간다.
하와가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예를 거스른 '사람'이 문제다.
그 사람은 지금 뱀처럼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반성은 이 글에서 말하듯, 사유의 본질이며 인간 이성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와로서가 아니라, '사람'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는
뱀이 아니라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
“생각을 잘못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
자왈 과이불개 시위과의
잘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못하고 성찰하지 않는 게 잘못이다.
죄지은 남자와 여자가 나무 사이에 숨자 하느님이 ‘사람’을 찾았다. “너 어디 있느냐?” 불쑥 남자가 대답한다. 마치 하느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란 뱀도, 여자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이. (이러면 참 곤란한데) 창세기는 고집스레 사람과 남자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하느님의 추궁에 ‘사람’이 늘어놓은 변명은 어처구니없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습니다.” 당신 탓이 반, 저 여자 탓이 반이라며 발뺌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물음에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나이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패스와 디스의 뿌리가 실로 깊다. 묻고 답하는 일은 여기서 딱 멈춘다. 뱀에게는 너 왜 그랬느냐, 하시지 않았다. 그건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니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묻는다.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뱀에게는 하지 않는 추궁을 우리(민심이 천심이기에)는 던진다. 그들이 사람임을 믿기에 한다.
맹자 공손추하 12장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왕의 실정에 실망해 제나라를 떠나는 맹자를 비난하는 윤사를 향한 발언이다.
予雖然(여수연)이나 : 내가 비록 그렇더라도
豈舍王哉(개사왕재)리오 : 어떻게 왕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王由猶足用爲善(왕유유족용위선)하시리니 : 왕은 그래도 족히 선을 할 만한 분이니
王如用予(왕여용여)시면 : 왕게서 만일 나를 기용하신다면
則豈徒齊民安(칙개도제민안)이리오 : 어찌 제나라 백성들만이 편안할 뿐이겠느냐
天下之民(천하지민)이 : 천하의 백성들이
擧安(거안)하리니 : 모두 평안하게 될 것이니
王庶幾改之(왕서기개지)를 : 왕께서 행여나 생각을 고치실 것을
予日望之(여일망지)하노라 : 나는 매일같이 기대하고 있노라.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최순실이 국민의 대답에 응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족히 선을 할만한(足用爲善) '사람'임을
그래서 행여나 생각을 고쳐서(改) 천하의 백성이 모두 평안하게 되기를
매일같이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日望之)
그들이 '사람'임을 믿기에 하는 기대다.
사족 하나,
사실은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얘기가
여성의 돌봄 능력이 전제조건이며
그 이후에 남성이 그 능력에 기대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여성은 남성의 비위(자존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심지어 먼저 태어난 것조차를 비밀에 부쳐야 하는
그런 식으로 읽히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