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이상향인 밝은 창에 깨끗한 책상은 이상 속의 책상일 뿐이다.
글을 쓰지 않은지 한참 지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글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은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공개되는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내 글로써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울해져 갔다.
구독자수가 늘면 늘수록
적어도 나의 글을 볼 수도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수록
이상하게 글은 써지지 않았다.
"글 쓰는 것 자체가 힘든 게 아니라,
진짜 힘든 것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최고의 나를 꺼내라>의 작가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글을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책상 앞에 앉는 게 어렵다.
나의 경우는 책상 앞이 깨끗해야 글이 써지기 때문이다.
'명창정궤'가 글쓰기의 조건이다.
그런데 책상을 치우기란 정말이지 어렵다.
칼 라르손의 '늦잠 잔 아이의 끔찍한 아침식사'란 위의 그림처럼
나의 명창정궤는 아침에 이렇게 아이와의 기싸움으로 흐트러진다.
명창정궤에서 책을 읽고 글만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선 애들이 밥도 먹고 레고도 하고, 손톱도 깎는다.
가끔이지만 문제집을 풀고 난 지우개 밥도 있다.
아침이 끔찍하게 지나간 자리에서
이기론을, 형상과 질료를 논하기는
어쩌면 더 잘될 수도 있고
어쩌면 늘 실패할 수도 있다.
한때 전혜성 박사를 무지 좋아했을 때
그의 책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에서 책상 얘기를 읽었다.
그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비결이
흔히 얘기하듯 장서수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책상수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책상이 많으면 아이들은 앉아서 책을 읽게 되고
뭔가를 끄적거리며 창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어서다.
그 후 나는 늘 인테리어에서 큰 책상을 가장 중심에 두고 생각했다.
나의 스위트홈은 '명창정궤'를 중심으로 설정됐다.
적어도 가로 200cm*세로 100cm의 크기다.
이건 두 사람씩 세 세트(총 6인)가 마주 앉아 맥북을 켜놓고 일해도
서로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큰 책상이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있는 5만 년 된 카우리 소나무가
100인용 서재 책상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우리 집의 MDF 책상은 아이들에게 큰 꿈의 장소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내 책상 성애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전혜성 박사가 <여자 야망 사전>을 출간 후
잠깐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셨을 때 인터뷰를 간 적이 있다.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지만 합동 인터뷰여서 질문할 기회가 적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여성은 언제 애를 낳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There is no convenient time for having a baby(애 낳기에 좋은 때란 없습니다)"
6명의 아이를 낳으며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녀는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우문현답이었다.
이 대답으로 미뤄볼 때
어쩌면 그녀의 야망 사전 중에 명창정궤는 없었을지 모른다.
여러 개의 책상이란
아이들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저곳 깨끗한 곳으로 옮겨 다니며 메뚜기 뛰듯 공부해야 했던
그녀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명창정궤는 엄청난 부지런함의 산물이다.
방학이기 때문에 강의 구상도 한답시고
모처럼 글을 많이 쓸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해서
책을 이것저것 펼쳐보는 여유를 부린다.
내가 수업에서 정한 참고문헌을 독파하는 괴로움에서 탈피해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기간이 방학이다.
(적어도 수업을 하려면 해당 책을 아무리 못해도 3번 정도 읽고 가려한다.
왜냐하면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이 최소 2번은 읽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읽으려면 적어도 그 책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 사랑하는 책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최근 <장서의 괴로움>이라는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발견해서 재밌게 읽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책을 읽는 방식에는 계독(係讀)이 있고, 남독(濫讀)이 있다고
계독은 특정 주제의식의 줄기를 따라 읽는 것이고,
남독은 산발적으로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이다.
당분간 학문을 놓았다는 방학(放學)은 역시 남독의 시간이다.
남독의 현장은 진짜로 남루(襤褸)하다.
책상이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애들 보고 책상을 치우라고 하면
"절반이 엄마 껀데..."라며 울상을 짓는다.
나도 메뚜기 뛸 책상이 여러 개 필요하다.
명창정궤는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깨끗한 책상.
선비의 방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이 단어의 출처는 송나라 학자 구양수의 <시필(試筆)>이다.
明窓淨机 筆硯紙墨 밝은 창과 깨끗한 책상. 붓과 벼루, 종이와 먹.
皆極精良 亦者是人生一樂事 모두 뛰어나 좋은 것 또한 인생의 한 가지 즐거움이지만.
然能得此樂者甚稀 이 즐거움을 누릴사람은 매우 드물다.
유원지(柳元之)의 '병을 앓은 뒤(病起)'란 시도 있다.
"따뜻한 방 병이 나아 뜻이 조금 맑기에, 시원한 곳 찾아 앉자 기운 절로 편안하다.
인간 세상 으뜸가는 쾌활한 일이라면,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서 시경을 읽는 걸세."
溫房病起意差淸, 坐趁輕凉氣自平.
多少人間快活事, 明䆫靜几讀詩經.
오랜 병치레 끝에 모처럼 책상을 깨끗이 닦고 볕 드는 창에 앉아
'시경'을 소리 내어 읽으니, 세상에 아무 부러울 것이 없더라는 얘기다.
아, 나도 이 기분은 좀 안다. 간혹 느껴서 그렇지만.
그러나 <장서의 괴로움>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명창정궤라는 사상 속에는 책장은 없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서재는 책장을 갖는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책장이 있으면 책을 꽃아 두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서재에 한해서다."
그는 그러면서 "책상 주변에 쌓인 책이야말로 쓸모 있다."라고 말한다.
"물론 일을 할 때 책상 주위에 쌓은 책은 매우 요긴하다.
쓸모 있는 책은 손이 닿는 범위에 놓아둔 책이다.
책을 둔다고 하면 도서관처럼 깨끗하게 책을 꽃아 두는 게 이상적인 게 아니다.
결국 손발처럼 사용하는 책은 주위 반경 1미터의 책 정도다.
책장에서 꺼내 책상 위에 쌓아두고 발밑이나 소파 밑에도 쌓인다.
이 책들이야말로 일하는 데 쓸모가 있다.
문제는 책상 주변에 쌓아 올린 책과 격납고라 할만한 책장 사이에 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다.
코앞에 닥친 일을 끝내고 필요 없어진 책을 원래 책장에 다시 꽂고 싶지만
책을 꽃을 책장은 이미 가득 차 있어 돌아갈 곳이 없다.
책장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
ㅋㅋㅋ
실제로 명창정궤가 이상향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꿈꾸는 걸 거부하는 건 내 손해다.
난 여전히 명창정궤에서만 글을 쓸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장서의 괴로움>의 저자 오카자키 다케시의 결론은 여전히 멋지다.
그는 진정한 독서가에 대해 얘기하면서
일본 총리를 지낸 영문학자 요시다 겐이치 씨의 말을 인용한다.
"책장에 책이 500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서너 번 다시 읽는 책을 한 권이라도 많이 가진 사람이 진정한 독서가다.
그래서 책 욕심이 많아도
결국 도서관으로 향한다.
서너번 다시 읽을 책을 우리 집에 둘지 결정하려면
우선 어떤 책을 한번이라도 봐야 하니깐.
매번 대출을 하고 읽지 못한 채 반납해도
(어쩌면 서너번 '읽은' 게 아니라 '빌린' 책이 우리 집에 들어올지 모를 일이다.)
내 답은 소유보다는 빌려 읽기, 결국 도서관이다.
내 책상이 매일 아이들의 끔찍한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로 레고로 수놓아져도
내 책상은 현실 속의 명창정궤며
그런 한에서
나는 여전히 글을 쓸 것이다.
이상 끝
이제 글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