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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진 WonjeanLee Mar 23. 2017

'다 좋은 세상'엔 언어가 필요하다.

'다 좋은 세상'은 사실이나,  우리의 언어로 그걸 말해야 한다.

최근 에밀 쿠에의 '자기 암시법' 즉 일종의 주문을 학부생 수업시간에 따라하게 해 본 적이 있다. 

긍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Day by day, in everyway, I'm getting better and better."


고백하자면 나는 이 문구 덕을 많이 보고 있다.

미치도록 우울해질 때, 머리를 감으며 웅얼웅얼하면 희한하게 기분이 멀쩡해진다. 


그러나...유명하면 대순가?

어떤 이에게는 좋아진다는 기준이 불명확하면 상당히 불편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첫 영성체 교리를 받으며

사도신경을 외면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말이 그렇게도 하기 싫었다. 



"전능하심 천주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과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 (가슴을 치며) 내 큰 탓이로소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와 형제들은 나를 위하여 우리 주 천주께 빌어 주소서.”(고백의 기도)



왜 내 탓이란 말인가? 어린 마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잘못이 내 탓이라고?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게다가 내 가슴까지 치면서 이걸 외우라니. 

이건 무슨 해괴망측한 모순된 주문인가?

이 고백은 자기(나의 존재)에 대한 엄청난 긍정, 자기를 하늘로 생각하고 임금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도였음을 알게 되고서는 보다 즐겁고 안심하며 내 가슴을 치게 됐다. 


"긍정의 배신",

"노오력의 배신", 

"공부의 배신"

 

이런 말이 소통되는 시대에서는 에밀 쿠에의 자기 암시는 

나란 존재를 긍정하고, 더욱이 나의 상태가 무조건 좋아지고 있다고 체념하고 긍정하라는 

희망고문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힘든 세대라는 20대에게 이런 희망고문은 더 비참한 주문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다 좋은 세상'임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좋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참하고 억울해도 우주 전체로 보면 

다 좋아지고 있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싶었다. 

다만 그 안에서 내가 대응해야 하는 일(바로 알기, 명징하게 인식하기)이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된다.

바로 알기와 명징하게 인식하기는 언어로 이뤄진다.  





기자로서 수많은 사건사고를 접하면서 헷갈릴 때

내게 엄청난 기쁨이 됐던 철학의 제 1 원리는 '다 좋은 세상(性善)'이었다. 

'다 좋은 세상'이라고 하면 혹자들은 반문한다.

세월호를 강남역을 흑산도를 구의역을 플로리다 올랜도 총기난사를

보지 않았냐고

그 사건들을 보고서도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냐고

그런 사건을 뒤로한 채 2500년 전 공자왈 맹자왈 하고 있으니

참으로 도나 닦으려는가 보다고

고전에 파묻혀 현재는 도외시하며 비겁하게 살 예정이냐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경악케 하는 그 모든 것은 사건이다. 

사건(incident)이 사고(accident)와 다른 것은 그 의도에 있다. 



의도란 가해자의 '생각'이다. 

물론 사건이 일어나면 사후처리가 중요해진다. 

사건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해 전모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증거 수집과 취재에 철저해야 한다.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제때 이뤄져야 한다.

다시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되지 않도록 전 사회적 대책 마련도 절실하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왜 가해자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가해자의 생각을 따져보는 일은 소홀할 때가 많다. 

취중에, 정신이상자라서, 라는 이유가 도마에 오를 때가 많다. 



흑산도 가해자는 취중이었고, 

강남역 살인자는 정신이상을 앓고 있었으며, 

100여 명이 넘는 미국 최악의 총기난사는 IS와 연관된 확신범이 일으킨 테러일 수 있다는 추측 정도다. 

가해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여러 원인 때문에 

'정상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이 경감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비난의 여론에 휩싸인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전문적 이유를 둘러싼 논쟁이

그들의 진짜 생각을 보는 걸 방해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보통 사건을 해석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를 대립시킨다. 

흑산도나 강남역은 성별의 대립인 듯 보이고 

세월호에선 나이 어린 자들의 나이 많은 자에 대한 무항명이 안타까웠다.

구의역은 장년 정규직과 청년 비정규직을 둘러싼 차이로 점철된다. 

플로리다 나이트 사건은 종교적, 국가적 대립을 전면에 내세울 예정이다. 

대선을 앞두고 총기 소유를 둘러싼 당파 간 갈등으로도 풀어갈 수순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대립은 가해자의 머리 속 생각에 있다.



나의 안위와 나의 안심과 나의 복지 나의 편의 나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나 하나쯤은(또는 나야말로)" 

"너 하나쯤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 

나와 너의 대립. 

정확히, 나라는 선과 너라는 악의 대립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선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려다 악을 범하고 말았다. 

'다 좋은 세상'이 아니고 

누군가가 악을 누군가가 선의 입장을 점해야만 한다면,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여혐에 대응해 미러링(멜겔)을 해도,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법안,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생명의 안전'이 문제 된 이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처리된다고 해도 한국과 국제사회는 여전히 불안전할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테일러 스위프트 말대로

the haters gonna hate, hate, hate, hate, hate (haters gonna hate)

I'm just gonna shake, shake, shake, shake, shake

I shake it off, I shake it off



그래서 

플라톤은 정치체제를 5가지로 구분했다. 

최선자정체(aristokratia), 명예지상정체(timokratia), 과두정체(oligarchia), 민주정체(dēmokratia), 참주정체(tyrannis)가 그것이다.

최선자 정체만이 '모두가 선'임을 알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모두가 모두의 덕(ergon)과 능력(dynamis)을 누린다. 

그런데 자꾸 '자기만이 선'이라고 일컫는 선민 사상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이 명예(명예정)이든, 돈(과두정)이든, 다수결(민주정)이든, 권력(참주정)이든

그것을 가진 자만이 선으로 일컫어지는 사회가 온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다 좋은' 사회, 누구 하나도 빼놓지 않고 좋은 사회만이 정의로운 사회다.

그 누구는 언제든 내가 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성선'을 말한 맹자가 강조한 "不嗜殺人者能一之(불기살인자능일지), 즉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통일할 것이란 말의 의미다.



벤담의 말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최대치를 아무리 늘린 들

'전부(all)'가 아니라면

참주 정치의 다른 말일 수밖에 없다. 

벤담 보고 '미안하지만 최대치에서 제외된 그 누군가가 돼라'라고 하면

그 자신은 되고 싶을까. 

사실 그래서

남의 고통을 보고서는 도저히 나의 행복을 느껴낼 수 없는 것이 

우리 감정의 진실이다.

만약 내가 운 좋게 그 자리를 피한 것이라는 위안이 

곧이어 올 나의 불운을 예고한다면

나는 행복할 수 없다.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0569


아침에 첫째와 나이가 얼추 비슷한 이 초등학생의 답변을 보고 

정말 통쾌했다.

문제를 낸 선생님께 드리는 이 일침은 

사실은 유니세프의 광고자들에게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보여주는 것.

나의 우월적 시선을 강요하는 것은

나를 선으로 자리매김하며 은근슬쩍 저들을 악(좋지 않은 것)으로 가른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며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면 

우리는 윤리적으로 사면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연민을 느끼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하고 우월한 환경에 안도하며, 고통의 원인에 자신은 전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뻔뻔한 착각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폭력적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넘어 또는 가해자에 대한 비난을 넘어 나와 타인이 똑같은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선'일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풍요와 안락이 정의로운가 즉 '다 좋은 세상'에서 얻은 것인가를 숙고하려는 성찰이다. 

혹시 나도 일상에서 선과 악을 가르고 있지는 않은지.

맹자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도 그런 얘기다. 남의 고통을 차마 참을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공자에게서는 '인(仁)'과 같은 뜻이다. 다 좋지 않다면, 모두가 선의 편이 아니라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선(性善)'이다. 

나는 이런 쪽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위의 글은 작년(2016년) 6월 13일에 페북에 쓴 글인데,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 등 흉흉한 사건사고 후에 든 감회였다. 기록으로 남겨두고 계속해서 세계적 사건사고에 일어나는 공통점을 소화해보고 싶단 생각에서 다시 가져왔다. 스피븐 핑커의 <우리 본성 안의 선한 천사>를 보면 이렇게 으스스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나도 인류 역사 전체에 있어서 폭력성은 확연한 추세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점을 연결시켜 연구해봐야겠다. 


이때와 달라진 생각은 이거다. 달라졌다기보단 구체적인 방법론을 추가하고 싶다. 

물론 공감이 필요하다. 남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최근 읽은 <메갈리아의 반란>에 의하면 여혐에 대응하는 메갈리아의 언어는 필요하다. 

그 언어는 나를 지켜주고, 선과 악의 대립에서 내가 실종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일단 '선과 악'의 구도를 '선과 선'으로 대치시키려면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 



유명한 마샤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라는 책에서도 폭력에 대한 대응에 침묵보다 높은 단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의 기분에 맞춰 침묵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그건 당신 문제야. 난 당신의 느낌에 아무 책임이 없어"라고 하는 '얄미운 단계(obnoxious stage)'가 필요하다. 



여혐 자체가 폭력이라면 그래서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면 그 슬픔을 누르려면 더욱더 명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식은 '사랑의 침묵'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로 이뤄져야 한다. 처음엔 얄미울 수 있지만 그건 폭력에 비하면 엄청나게 약한 부정성이다. 

그것이 여성들의 언어다. 구체적으로는 엄마들의 언어다. 

엄마들에겐 엄마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여성으로서 자궁으로서 출산율로서 이 나라의 국력에 봉사한다고 여겨지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무급 돌봄 노동에 시달리는

모순된 평가에 대해 우리만의 언어를 내면 서다. 

엄마됨을 후회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왜 이 시대에 엄마됨이 이토록 힘든지, 아이들이 예쁜 것과 별도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잃어왔고

하나의 기능으로만 복속해왔는지를 말해야 한다. 

나는 말하기 위해 언어를 찾고 있다. 



새 언어를 배우는 길은 늘 어렵지만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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