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진 WonjeanLee Sep 20. 2017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와 사랑에 빠진 올 가을

영원한 이방인 이반 일리치


부끄럽지만 '이반 일리치'라는 작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오히려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이 사람 정말 사람을 끈다.


오늘 세바시에서 본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에 따르면

처음과 끝이 맞물려 닫힌 무정형의 도형을 그려놓고

이게 (아이가 그린 것일 뿐 또는 왼손으로 그린 것일 뿐) 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적

원이라는 건 정확한 원주율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원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적

이라고 하는 실험 결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반 일리치는 정말 진보적이다.

그는 모든 문명과 현대와 자본주의의 허점을 통렬하게 짚어낸다.

모든 것을 다 거부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의 책 제목에 따르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다)

내가 서 있는 이 모든 전제(가정 hypothesis)를 검토하는 사상가다.

그것이 서 있을 만한 반석인지 아닌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이방인이다.

우리가 쓰는 '가난' '가치' '쓸모' '자원' '에너지'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검토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폭력성에 대해 고발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이방인의 인생을 살았던 듯하다.

어디에 속하면 늘 나는 뭔가 안 맞는듯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신기한 건 사람들은 다 "네가? 별로 그래보이지 않는데.. 잘 적응하는 줄 알았어."라고 했다는 거다.

그래서 직장을 바꾸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나 같은 생리를 갖고 있어서, 나는 또한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내가 특정 그룹에 속한 게 어색한 게 아니라

'이방인'이 바로 내 정체성이란 걸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그런 내게 내가 왜 이방인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방인이어도 괜찮다고

아니 도리어 이방인인게 엄청난 힘을 가진다고

위로해 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오염된 시간과 그림자 노동


그에 홀딱 빠져버린 이번 가을 초입,

그를 만난 건 연구노동과 육아노동과 가사노동을 고민하던 내 문제의식 덕분이었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서로 같은 부류로 치부돼서는 안되며,

오히려 성격이 전혀 다르고

서로를 상보(相補)한다기보다는 상해(相害)한다.

왜 그런지는 해보면 안다.

애를 겨우 재우고 나서야 설겆이나 빨래, 청소를 해본 사람,

그리고 애가 깰까봐 얼마나 조바심나게 이 가사노동을 하는지는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두 개 노동의 이질성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집에서 하는 연구노동까지 더하면 그건 정말 상해와 오염의 극치다. )  

다 끝없는 노동이며 그림자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일치한다.

물론 나는 이들을 굳이 노동(프랑스어 travail는 족쇄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부정적 어원이다)이라는 의미를 부과하지 않고 나름 즐겁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염된 시간(contaminated time)이라는 용어를 알게 되고부터

나에게 찾아오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브리짓 슐츠는 <타임푸어>에서 이런 시간을 이렇게 분석했다.


"칙센트미하이의 시간 활용 연구에 따르면 여자들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고된 '정신노동'을 한다. 여자들은 아이들, 집안일, 직장일, 잡다한 볼일, 가족 행사 등의 시시각각 변하는 일들을 항상 머릿속에 넣고 있다. 그래서 여자들은 시간의 압박 때문에 숨 돌릴 틈조차 없다고 느낀다."
"20대 때 친구들과 함께 해변에 가서 여유롭게 보낸 하루와, 햇볕에 약하고 수영을 못 하고 낮잠도 자야 하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해변에서 보낸 하루는 완전히 다르다. "


같은 해변을 가도 아이들을 돌보느라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여성의 여가는 오염된 여가라는 거다.

그런데 바로 그 내용을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노동: shadow work>이란 책에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딱~보는 순간 바로 느낌이 왔다. 저건 나를 위한 책이구나.


그런데 기대 이상이었다.

단순히 여성 아니 연구자, 아니 현대인의 오염된 시간을 위로하는 책이 아니었다.

그는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점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타가 음반보다 귀하고,
도서관이 교실보다 귀하며,
텃밭이 슈퍼마켓 식품 코너보다 귀하게 대접받는 사회"를 꿈꾸는 대목에선

난 거의 울뻔했다.   



가사노동은 거대한 그림자 노동의 한 가지 사례로
이 그림자 노동은 산업사회 전 영역에서
임금 노동을 확대하기 위한 필수적 보완물로써 발전해온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그림자 보완물은 공식 경제와 더불어
산업적 생산양식의 필수 구성요소를 이룬다.
양자역학 이전에는 소립자에 파동의 성질이 있다는 것을 몰랐듯
그림자 경제 또한 경제학의 분석 대상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두 가지 무급 활동-임금 노동의 보완물로서의 그림자 노동과
임금 노동 및 그림자 노동 모두에 대해 경쟁하고 대항하는 자급자족적 노동 사이-의
진짜 차이점은 여전히 간과될 수 있다.
이렇게 자급자족 활동이 점차 희귀해짐에 따라
모든 무급 활동은 가사 노동과 비슷한 구조를 띠게 된다.
성장 지향적 노동은 유급이건 무급이건 획일화되고
관리되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자급자족 중심의 생활양식을 택한 공동체에서는
이와 상반된 노동관이 우위를 점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정반대의 발전,
즉 소비재를 사는 대신 사람이 몸소 제작하고
산업적 도구 대신 공생 공락의 도구(convival tools)를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의 산물인 재화와 서비스가 강제적 소비 대상이 아니라서
창의적 활동의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지니므로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 모두 쇠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기타가 음반보다 귀하고,
도서관이 교실보다 귀하며,
텃밭이 슈퍼마켓 식품 코너보다 귀하게 대접받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개별적으로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각 사업의 작은 지평이 결정된다.


잉여인간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에 대한 분석은 도처에 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의 분석은 우리의 행동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금은 전문가의 관리가 아니라
대중의 결단과 정치행동이 필요한 때"


그런데 더 재밌는 그의 책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름하여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The Right to Useful Unemployement: And its professional enemies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작, 느린 걸음 출판사)


"최근 들어 사람들 속에 자신이 바라는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이들은 세계 어디서나 부당한 차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 차별 탓에 목표를 세우고 필요한 걸 결정하는 자신감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 때문에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박탈에 분노하는 소수의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위기(crisis)의 본래 그리스어 의미는 선택 또는 전환점이다."


어디나 가면 "언니, 관리 좀 받으셔야겠어요" 한다.
(무엇보다 난 당신의 언니가 아니다)
educare
medicare
judicare....
haircare
skincare

관리는 지겹도록 받았다.
잉여로움,
나를 관리대상 자원(resources)이 아니라
공유로 인식하게 하는 삶의 전환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타임푸어, 오염된 시간, 그리고 그림자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기의 선택에 달려있다.

내가 전문가라는 시장 상품에 기대어 살아가고, 또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볼 자유를 스스로에게 줘 보는 것.

그 빈둥거림과 잉여로움을 만끽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일이다.

다시 돌아가보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혹시 내가 나를 관리대상의 자원으로

케어받아야 할 부족한 미생의 여성으로, 엄마로, 인문 연구가로,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나는 늘 어디서나 그 관리에 익숙해지려 하다 이방인이 된 건 아닌지



쓸모와 윤종신


나의 쓸모는 내가 결정한다.

쓸모는 '쓰일 곳이 있다'란 뜻이다.

쓸모의 그리스어 의미는 ergon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synergy의 어원이 되는 synergon은 에르곤끼리의 결합(syn)이다.

사람이 모여사는 곳에서는 한 명 한 명의 에르곤이 합쳐져 시너지가 나게 돼 있다.

에르곤이 없었더라면 시너지도 없다. 시너지의 근본 요소는 에르곤이다.

내 에르곤은 내 달란트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걸 하고 살아야 시너지가 난다는 단순한 진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나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걸 잊었다.

윤종신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송에서 얻은 인기로는 만족이 안 되던가. 왜 계속 실험을 하는가.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결국 덧없는 게 팬덤(열성 팬)이더라. 팬덤은 태생적으로 정점 찍고 내려올 수밖에 없다. 어려야 유리하고. 그래서 '팬덤 비즈니스'보다는 '성향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향 비즈니스가 뭔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 '월간 윤종신'이 그 무대다. 내 이름으로 8년간 콘텐츠와 내 생각을 '던졌다'. 그러니 이 플랫폼 자체가 지닌 성향이 생기더라. 소리 소문 없이 모인 사람이 50만 명 정도 된다. 팬덤은 자꾸 요구하고 뭔가를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인데, 성향이 맞아서 들어오는 사람은 기대하는 게 적다. 배신·배반하지 않는다. 가볍게 들르지만 내게 정보를 충분히 준다."


윤종신에게 쓸모는 팬덤이나 차트가 정해주는 게 아니다.

윤종신은 차트에 의존하지 않는 진정한 쓸모를 자신에게 찾아내고자 했던 사람이다.

8년을 월간 윤종신에 투자했다.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모인 사람에게 쓸모를 제공했다.


월간 윤종신의 온라인 실험은 지난해 문을 연 이태원의 복합문화공간 즉 오프라인으로 확장됐다.



그래서 송나라 철학자 주희는 용력지구(用力之久)라는 말을 했다.

내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힘을 모아 오랜 시간 집중하면 결국 위대한 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내 힘이 이미 쓸모라는 거다.  쓸모의 정의를 멀리서 찾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여기서 역시 윤종신의 말이 답이 된다.


―끊임없이 새롭기가 어디 쉬운가.

"우리 머릿속엔 늘 새로운 생각이 많다. 안 될까 봐 끄집어내지 못할 뿐. 그런데 안 된다는 건 대중을 섣불리 판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대중은 때론 백치고 때론 천재다. 창작자가 '난 감 잡았어' 생각하는 순간 실패가 시작된다."


유학은 모든 것은 나면서부터 천명을 받고 태어난다는 의식에 바탕해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중용의 첫 일성이 아니던가?

그렇게 하늘의 명을 받았는데, 쓸모가 없을 턱이 없다.


사회가 편견으로 규정하는 쓸모없음을 거부하고, 나의 쓸모있음을 믿고 버티기.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또 장자는 ‘미성재구(美成在久)’라며

‘훌륭한 일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했다.   


“쓸모없는 지식의 효용”은 프리스턴 고등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아브라함 플렉스너가

1933년 잡지 ‘하퍼스’에 기고한 기사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의 역사에 있어 인류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 중요한 발견의 대부분은,

쓸모 있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연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쓸모없는 활동에서 태어난 발견은, 쓸모 있는 것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보다

무한히 큰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결론은 나를 믿자다.

나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향해 뚜벅이처럼 걸어갈테다.

왜냐면

이대로 내가 재밌으니까

이대로 사는 게 나다운 거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다 좋은 세상'엔 언어가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