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전복적 인간지능, 나를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지난 6월 오마이스쿨 최진기 대표가 <어쩌다 어른>이란 방송에서
다른 화가의 그림을 장승업의 그림으로 잘못 소개하며 강의한 게 도마에 올랐다.
당시 이에 대해 한창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그 중간에는 성찰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에서
명료하게 떨어지는 정답을 가르치는 학원강사 출신의 인문학자가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어서 있었다.
더 중심엔 '정답'을 가르치는 인문학에 대한 회의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이라고 정답이 없다는 생각은 재고해봐야 한다.
인문학에 정답이 없다면 배울 필요도 없지 않을까.
정답이 없는 것을 왜 배울까.
배워봤자 알쏭달쏭할 뿐이라면 왜 배울까.
배워서 더 괴로울 뿐이라면.
배워서 더 슬픈 것이 인문학이라면.
내가 배운 바로는
인문학의 정답은 바로 '나로 돌아감(반구저기(反求諸己)'에 있다.
'소중한 내 존재'가 정답이다.
부모님이 주신 그대로 '나답게' 사는 게 바로 정답이다.
그 밖에 뭐가 필요할까.
1타 학원강사가 아니라 누구라도 인문학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공자는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한다면 '사무사'라고 했다.
즉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자왈 시 삼백에 일언이폐지하니 왈 사무사니라
-논어, 위정 2장)
여기서 인문학을 시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인문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무사'라는 것이다.
또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냐? 나는 일이관지(一以貫之) 일뿐"이라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웠다고 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자공이 "예.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니
공자는 "아니다. 나는 하나로 꿸 뿐이다."라고 하였다.)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게 뭘까. '나'라는 정답으로 하나로 꿰었다는 뜻일 아닐까.
나의 소중함, 나만이 갖고 있는 달란트로 세상을 살아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를 바꿀 필요도, 나를 개조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의 밝음을, 반짝임을 최대로 해서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게 나답게 사는 것일 것이다.
취업, 창업을 넘어서 '창직(創職·Job creation)'을 하자는 말이 돈다.
이제는 '창직'의 시대가 지났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번 학기 학부 강의에서 '직업'에 대해 수업하면서 직업의 의미를 고민했다.
또 '자기계발'이라는 개념도 재정의해야 했다.
여태까지의 직업은 나를 충분히 반영해주지 못했다.
전업으로 일하다 프리랜서로서 시도해본 삶이 이제 1년 반 정도 돼 간다.
경제학자들은 이제 'gig economy'의 시대가 온다고 한다.
필요에 따라 기업들이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직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형태의 경제다.
긱(Gig)은 하룻밤 계약으로 연주한단 뜻으로
1920년대 미국 재즈공연장 주변에서 필요에 따라 연주자를 섭외한 데서 나온 말이다.
프리랜서가 곧 비정규 노동직을 의미하는 한국에서는
(전천후 용병을 뜻하는 'freelancer'보다는
나는 다니엘 핑크의 'freeagent' 개념이 더 마음에 든다.)
허울이 좋아 프리랜서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 경제적 보상은 줄었지만 개인적 만족은 늘었다.
개인적 만족은 '나'를 찾은 데 있다.
우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부든 외부든 '검열'에 시달리지 않고 내 말을 하고 싶었다.
내 속의 진짜 얘기,
그날그날 '기사 메모'를 위한 메모가 아니라
내 안에서 매일 꿈틀대는 감정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주변과 나누고 싶었다.
내 감정이 진실한 것인지
이대로 살아도 문제없는 것인지
확인받고 안심하고 싶었다.
전문가의 멘트를 받아서 객관성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판단하고 싶었다.
공적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내 주변의 사람과 소통하고 싶었다.
내 아이, 내 남편. 내 가족, 내 친구들부터
테레사 수녀의 시처럼 <한 번에 한 사람씩>
내가 사랑스럽다고,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다고
어쩔 때는 그 사람이 죽도록 밉지만,
그것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말을 하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답이 '나'가 아니라면
이렇도록 소중한 '나'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그런 인문학은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만약 정답이 나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면
내가 소중한 만큼 남이 소중함을 상기해준다면
그게 학원강사 출신이든 법학박사 출신이든, 천문학자이든
무슨 상관일까.
정답을 말하는 강사가 무슨 잘못일까.
어차피 우리는 강사를 통하지 않아도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 정답을 강사가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이라면
그게 유명강사든 무명 강사든
백화점에서든 자치회관에서든
'참을 수 없이 가볍지' 않다.
일각에서 나온 최 강사의 가벼움에 대한 질타는
그의 강의가
'나'에 대한 성찰, '나의 소중함'에 대한 반구저기를
어쩌면 방해한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문학에 정답이 있으면 안된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엔
학원 강의식의 인문학의 문제는
자기가 직접 자기 얘기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학원 강의에서도 자기 얘기를 하지 않고
청중의 얘기를 듣지도 않는다.
단지 강의의 일방성 때문에
인문학의 상품화가 문제가 된다면
플라톤 아카데미나 TED, 세바시 등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모두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TED나 세바시는 때로는 정말 재밌다.
성공한 사람들이 고백하는 자기 얘기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나에 대한 '생각'이 들어가게 된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 손예진이 광기의 연기를 펼쳐내면서 내뱉는 말이다.
실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지 않나.
생각 그리고 배움은 '학여사(學與思)'다.
學而不思則罔 학이불사즉망
思而不學則殆 사이불학즉태
<논어> '위정爲正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이 없으면 곧 망하고,
생각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곧 위태롭다.
불사(不思)가 보여주는 망(罔)은
중독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냥 중독된 사태로 살아간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Il faut vivre comme on pense, sans quoi
l'on finira par penser comme on a vécu)
란 폴 부르제(Paul Bourget)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
(Insanity: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Albert Einstein-)
'음모이론'이 있다.
언론에서는 무언가를 덮기 위해
예를 들면 지금 상황에서 백남기씨 사망과 미르와 K스포츠재단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초특급 뉴스(특히 연예인에 관한)를 생산해 내
사람들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게 하는 것이다.
어느 국회의원의 놀라운 단식투쟁도 그런 일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북한이 꼭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미사일을 터트리는 것처럼
이들은 언론의 생리와 민중의 관심사를 알고 있다.
심지어 휘발성이 강한 페이스북에서도
가장 열독률이 높은 시간대(9시 출근시간, 12시 점심시간) 등을
접해서 타임라인에 자신의 글을 올리려는 것은
트래픽이 강한 지점을 장악하면 여론을 주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개돼지'라 지칭되는 가상의 민중들은
생각할 시간 없이 새롭게 터지는 사건들에만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최근에 본 <부산행>에서 좀비들이
어두워지는 터널에서 보이지 않으며 가만히 있다가
빛에 의해 새로운 영상을 지각하면 바로 달려드는 습성을 보이듯 말이다.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1857-1929)은
'가난한 이들이 왜 보수적이 되는가'를 추적했다.
유한계급제도는 생존 수단에 해당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을 하층계급으로부터 박탈해
그들의 소비를 줄이며 그 결과 이들의 에너지를 소진시켜
학습은 물론 새로운 사유 습성의 채택에 필요한 노력을 할 수 없는 지점으로 이들을 몰아감으로써
결국 보수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유한계급론>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베블렌이 말하듯 가난하면서도 보수적이 될 것이다.
일종의 중독 또는 금단현상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려는 게 바로 나라는 정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최근 선릉역에 문을 연 '최인아 책방'의 표제어는 '생각의 숲을 이루다'이다.
이 글귀는 "아는 것이 힘인 시대로부터 생각이 힘인 시대가 됐습니다."
로 시작한다.
정재승 KAIST 교수는 최근 한 칼럼에서 "인간 지성이 인공 지능과 다른 핵심은 전복적 사고"라고 말했다.
전복적 사고는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창작의 과정이다.
기존의 나온 작품들을 섭렵한 뒤에,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예술적 창의성의 핵심이다.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나온 기존 논문들을 금과옥조라 믿고 모두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좋은 연구를 하기 어렵다.
그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권위에 눌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심하며,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대담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할 창의적인 실험에 몰두하는 일.
그것이 뛰어난 과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법이다.
인공지능의 핵심이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인식을 확장하는 능력이라면,
인간 지성의 본질은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치 전복적 아이디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자신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새롭게 구성하고 이해하는 일, 개인적 경험 안에 인식의 틀을 가두지 않고,
데이터에만 매달리지 않는 비판적 사고가 인간 지성의 중요한 토대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760871.html
정재승 교수가 의미했던 바는 철학의 관점에서 풀면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빅데이터는 지식을 거부할 수 없다.
오직 사람만이 시비지심(是非之心), 곧 사단( 四端) 중에 '智(지)'을 갖고 있다.
"기계는 답을 위해, 인간은 질문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과학기술잡지 '와이어드'를 창간한 케빈 캘리는
'파괴학습'을 얘기한 적 있다.
개인적으로 파괴보다는 파기가 맞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습득학습이 아닌 버리는 학습,
즉 시비를 가리고 비를 과감하게 파기할 수 있는 지능
이것은 퇴계가 4가지 감정(사단, 四端)이라고 말했던 우리 안의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시람의 뇌는 살아남기 위해
낙관 편향(optimism bias)을 만든다는 뇌과학자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신경전문가 탈리 샤롯은 그의 책 <설계된 망각>에서 망각으로 진화된 인간의 뇌를 규명한다.
원제는 "The Optimism Bias: A Tour of the Irrationally Positive Brain"인데
비이성적(irrational)이라고 말한 것은 데카르트식의 이성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가 아닐까 한다.
한마디로 잊어버릴만하니까 잊어버리는 게 알츠하이머 병이 아닐까.
영화 <노트북>을 보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려도 여주인공 앨리는 사랑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나답게.
'내가 정답'임을 지키면서 산다는 게 녹록치는 않지만
또 나를 못 믿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나 싶다.
오늘 요가 수업에서 선생님은
"요가에서, 또 삶에서 제일 중요한 건
inhale과 exhale의 리듬을 동등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뼈아프더라도
들여마시고 생각할때는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숨을 편하게 뱉어낼 수도 있으니까.
백남기 정국에도, 미르,K스포츠재단 정국에도
자기를 외면하고 역겨운 숨을 뱉어내려고만 하는
'자기답지 못한 정권'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맹자는 사지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시비지심이 있다고 했다.
만약 이 정권이 사망한다면 그 사인은 질식사가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