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치명적 오독 4가지
거리의 철학자라고 자칭하는 강신주 씨가 페미니즘, 그리고 '공자孔子하는 여자'를 비판했다.
그는 최근 개정증보판 <철학 vs. 철학>을 펼쳐내면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Q 이 책은 앞에서도 말했듯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자들을 아우르고, 기존 철학이 수용하지 않았던 배타적 영역들도 끌어왔으며, 방대한 분량이 특징이다. 그런데 1500페이지 중 등장한 여성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단 한 명뿐이다.
철학자 중에 여자가 없다. 물론 20세기 들어와서는 좀 있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그 정도 가지곤 안 된다. 중요한 건 자기편만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다른 편마저도 동감하도록 하는 거다. 하지만 지금 시대를 보면 아직도 협소하다. 남성을 이해하고, 여성을 이해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져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까지 안 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정권이 여성에게 부여된 것이 20세기 들어와서니까.
이 책에 한나 아렌트 한 명 들어온 것이 우리 인류 문명의 현주소라고 보면 된다. 내가 대학원 시절에 가장 황당했던 게 여자인데 공자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나는 넌지시 “너 미쳤냐?”라고 묻기도 했다. 여성의 가치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공자를 연구해서 뭐하게. 그런데 공자를 연구하는 이유는 동양 철학에서 유학을 공부해야 주류라는 쪽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철학함이 아닌 전형적인 철학의 논리인 거다. 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가 남성 주류 사회에서 남성한테 인정받으려고 해서 생긴다. 페미니즘을 여기에 한 항목으로 넣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수준이 떨어져서 넣지 않았다.
Q 페미니즘이 어떤 점에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나?
이 책에서 다룬 내용과 비교해 아직 그 수준이 맹아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가 여성이며, 음악을 좋아하고, 음식을 잘한다는 등의 특징을 전체로서 봐야 인문주의 시선이 생긴다. 그런데 ‘여성’, ‘남성’이라는 이유로 들어가면 파시즘적 담론인 거다. 그건 유대인이란 이유로, 친일파란 이유로, 일본 사람이란 이유로 비판하는 것과 같다. 여성, 남성을 일반화시키는 페미니즘이 파시즘적 담론에서 자유로울까? 이런 이론을 책에 올려놓게 되면 내가 비판할 수밖에 없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걸 확대하여 해석해서 그들이 얘기하지 않은 것 이상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거다.
혹시 기자분이 인터뷰를 할 때 용어를 취사선택하다 오해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철학자가 없다고 한 말은 실수였다.
만약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가르쳐줬던 여인 디오티마와 나눈 대화가 핵심임을 읽었다면
디오티마의 지혜("그런데 에로스의 부모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포로스와 페니아라고 한 대답)를 듣고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유교를 여성 억압적이라고 규탄하며 '공자 하는 여자'를 '미쳤다'고 폄하한 것은 더욱 실수였다.
나는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슬픔의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감정의 적신호라서 무조건 떨쳐내야 하는 게 아니라, 왜 슬픈지 알아서 배워야 하는 감정이라고
나는 스피노자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아직 그의 <철학 vs. 철학>을 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감정 수업>은 읽어봤기에 내가 공부했던 스피노자의 철학에 근거해서 비판해보려 한다.
2년여 전에 그가 <힐링캠프>에 나와서 독설로 상담을 한 후,
30대 여성 사이에 <감정수업>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30대 여성에게 '철학함'을 일깨워주려 했던 그가 어째서
'여성의 철학'을 부인하게 됐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주된 독자층을 모욕한 것이 되기에.
<감정수업>을 읽어보면 강신주는 '사랑의 철학자'를 자칭한다.
감정에 충실하고 자기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주인이 되는 것이며 사랑에 풍덩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피노자가 <에티카> 3권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중 마지막 부록처럼 쓰여있는 '정서의 정의'라는 곳에서 나온 48가지 감정들을 주목한다.
그 감정은 다음과 같다.
(※한국어 번역은 서광사의 <에티카>(강영계 옮김, 2008)를 따랐기 때문에 감정수업과 다를 수 있어 괄호 안에 라틴어와 영어를 병기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라틴어로 썼다. 스피노자의 원문과 강신주의 글을 비교 분석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에티카> 원문은 박스 안에 인용하고, 강신주의 글은 세로줄 오른쪽에 인용했다. )
1. 욕망(cupiditas, desire)
2. 기쁨(laetitia, joy)
3. 슬픔(tristitia, sadness)
4. 경탄(admiratio, wonder)
5. 경멸(contempus, contempt)
6. 사랑(amor, love)
7. 미움(odium, hate)
8. 경향(끌림)(propensio, inclination)
9. 반감(aversio, aversion)
10. 헌신(devotio, devotion)
11. 조롱(irrisio, mockery)
12. 희망(spes, hope)
13. 공포(metus, fear)
14. 신뢰(securitas, confidence)
15. 절망(desperatio, despair)
16. 환희(gaudium, gladness)
17. 가책(conscientiae, remorse)
18. 연민(commiesratio, pity)
19. 호의(favor, favor)
20. 분노(indignatio, indignation)
21. 과대평가(existimatio, partiality)
22. 멸시(despectus, scorn)
23. 질투(invidia, envy)
24. 동정(misericordia, sympathy)
25. 자기만족(acquiescentia, self-approval)
26. 겸손(humilitas, humility)
27. 후회(poenitentiae, repentance)
28. 오만(superbia, pride)
29. 소심함(abjectio, self-abasement) disgust
30. 명예(gloria, honor)
31. 치욕(pudor, shame)
32. 동경(desiderium, longing)
33. 경쟁심(aemulatio, emulation)
34. 감사(gratia, thankfulness)
35. 자비심(benevolentia, benevolence)
36. 적의(ira, anger)
37. 복수심(vindicta, vengence)
38. 잔인함(crudelitas, cruelty)
39. 두려움(timor, timidity)
40. 대담함(audacia, daring)
41. 불안함(겁)(pusillanimitas, cowardice)
42. 당황(consternatio, consternation)
43. 공손함(humanitas, courtesy)
44. 명예욕(ambitio,ambition)
45. 미식욕(luxuria, gluttony)
46. 음주욕(ebrietas, drunkenness)
47. 탐욕(avaritia, greed)
48. 욕정(libido, lust)
강신주는 <감정수업>에서 이 48가지 감정을 가스통 바슐라르의 땅, 물, 불, 바람의 4요소로 편의상 4부로 나눴다고 했지만 사실 책을 읽어보면 라틴어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에티카(1677)>를 엄밀한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서 기술했다.
총 1~5부까지 신(1부), 정신(2부), 정서(3부), 지성(4부), 자유(5부)의 주제를
정의, 공리, 정리, 증명 등 유클리드 기하학적 방식에 근거해 논리적으로 전개했다.
그가 감정을 48가지로 나누고, 1번은 욕망, 2~3번을 슬픔과 기쁨이라고 순서 매긴 것은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가장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나뉜다. 사실 크게 감정은 두 가지밖에 없다.
기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슬픔을 피하고픈 욕망.
이후 2~31번까지의 감정을 '기쁨과 슬픔(2~3번)'으로 양분해서 대조하며 설명하고
32~48번까지의 감정을 '욕망(1번)'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이 순서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으로 기하학적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설명했는데
강신주는 <감정수업>에서 그 논리를 단순히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며 흩트려트렸다.
48가지 감정을 라틴어 알파벳 순으로 정리해나가면서
각 감정이 만들어낸 치명적 사랑을 보여주는 문학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언뜻 세계적 문호의 작품을 택하고 그 소설의 사랑을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옹호하면서
기쁨과 슬픔의 변주곡을 부드럽게 연주한 듯 보인다.
그러나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드러내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2번째 감정이자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감정인 '기쁨(laetitia)'이 48가지에서 아예 빠져있다는 점이다.
그는 스피노자의 정서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
기쁨(laetitia)과 헌신(devotia)의 자리에 각각 쾌감(titillatio)과 수치심(verecundia)을 넣었다.
쾌감과 수치심이 원문에서 해명으로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에티카> 원문의 48가지 감정 구분과 다르다.
수치심은 사실 치욕과 통하므로 하나로 처리했어도 된다. 헌신은 빠졌어도 된다고 하자. 그러나 기쁨을 쾌감으로 대체해서는 곤란하다.
스피노자에게 기쁨은 가장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순서바꿈이나 정의 변경에 대해 저자가 어디에도 설명을 달아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주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고 나면 감정에 관한 혼란된 관념에 빠지게 된다. 어찌할 수 없는 욕정, 치명적 사랑 이런 욕망의 노예가 돼서 불륜과 살인, 교살을 일삼는 일부 비극적 문학작품의 뒤끝은 말할 수 없이 찜찜하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48가지로 나누어 그 각각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했던 전대미문의 철학자였다. 더불어 각각의 감정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굴곡지게 하는지 걸작으로 보여준 수많은 문학가가 있다. 존 파울즈, 카뮈, 푸엔테스, 에밀 졸라, 톨스토이, 조지 오웰, 투르게네프, 피츠제럴드 등.
<감정수업 25p>
소설이 문제는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감정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러나 그 감정대로만 살아낸 등장인물이 과연 행복했을까를 자문해보도록 한다. 그야말로 간접경험을 통해 "이렇게 살아보니 어때? 과연 기분이 좋을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같은 상황에서 결정해야 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를 치열하게 묻는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비극적 서사시를 경계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삶이란 것은 결국 이럴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도 내가 저 주인공의 운명보다는 낫군"하고
비관 또는 위안하는 데 그치면서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게 삶의 주인된 태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타당한 인식'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남을 죽이거나, 자살하거나 하는 건 타당한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쁨으로 귀결된 자유가 아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모든 슬픔의 감정은 '타당하지 못한 인식' 즉 '인식의 수동'이며
이것은 지성(배움 또는 앎)을 통해 기쁨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런 비탄의 슬픈 감정으로 당당히 살아내야만 한다는 걸까.
그게 그가 말하는 감정을 살려내는 일일까.
프롤로그에 강신주는 이렇게 썼다.
"슬픔, 비애, 질투의 감정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에, 내일을 더 간절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 내일은 행복한 감정에 젖을 수도 있다는 설레는 마음,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힘이 아닐지"
그럴까. 이거야말로 '희망고문' 아닐까.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애써 묵인하고 참아내려는 것 ,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외치는 것도 어쩌면 감정의 멸시 아닐까.
오히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불쾌한 감정이 왜 연원했는지를 알아서,
잘못 생각한 게 있다면 바꿔내는 게 맞지 않을까.
불쾌한 감정은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붙들고 왜 그런지 알아봐야 하는 감정이다.
내일은 행복한 감정에 젖을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이란 스피노자가 말한 '희망'(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해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 기쁨)이다. 희망은 공포와 연관된다.
내일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희망고문은 일종의 공포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형제간에 다툼이 생긴다.
아이들은 "형이 또는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심심찮게 고백한다.
그러니깐 존재의 부정이다.
그런데 나쁜 것을 아는 것은 좋음이 뭔지를 아는 사람만이 결정한다.
애초에 좋음을 모른다면 나쁘다는 감정 역시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적 문학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들이 좋음을 알고 있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에 휘둘리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모든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기쁘기 위해서다. 기쁘려는 욕망, 이것이 감정의 본질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것은 감정의 강력함에 직면했던 인간의 절망스러운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하게 스피노자만은 '이성의 윤리학(칸트)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감정수업 19~20p>
이는 스피노자의 '감정과 이성의 일원론'을 완전히 무시한 자의적 해석이다.
이렇게 강신주는 스피노자를 감정의 윤리학자로 칭송하면서 이성의 윤리학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스피노자는 자신의 에티카 자체를 기하학적 체계에 따라 논리학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가 이성을 거부했다면 <에티카> 4부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Amore intellectuali infinito, The intellectual love of God)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신주는 그의 책 어디에서도 "타당한 관념과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3부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나눈 것은 그 뒤의 4부와 5부에서 타당한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성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욕구한다. 그러나 이 충동은 이성에 따라 인도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수동이고, 이것은 명예욕으로 불리며 오만과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그것은 능동이나 덕이며 경건함으로 일컬어진다. 이렇게 해서 모든 충동이나 욕망은 타당치 못한 관념에서 생기는 경우만 수동이며, 그것이 타당한 관념에 의해 환기되거나 생길 때 덕이다. <에티카> 5부 (정리 4)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결정짓는 모든 욕망은 타당한 관념과 아울러 타당하지 못한 관념에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제 4부의 정리 59 참조). 그러나 정서에 대해서는 정서를 참답게 인식하는데 존재하는 요법을 도외시하고 우리의 힘 안에 존재하는 이보다 더 탁월한 다른 요법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사유하며 타당한 관념을 형성하는 정신 능력 이외에 다른 정신 능력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시간도 두 가지로 나눈다. 지속의 시간과 순간의 시간.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는 두 가지 시간이지만 그는 하나만 인정한다. 그중에서도 영원의 순간적 시간을 파국적 해방으로 인식한다.
스피노자가 '지속'을 부정하고 영원을 얘기했던 것은 순간이 주는 기쁨을 인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신주는 영원(순간)을 폭발적인 열정, 무질서, 격정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결국 슬픔을 갖고 온다.
인간에겐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이다. 지속의 시간은 결혼생활에서 쉽게 확인된다. 왜냐고? 결혼 생활은 질서와 조화, 그리고 안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순간의 시간은 열정적인 연애를 통해 폭발한다. 연애란 결혼과는 달리 무질서, 격정, 그리고 환희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감정수업 472p>
그 결과 그는 불륜의 연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한다.
결혼과 오래오래 불타는 사랑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랑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
적어도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감정을 이렇게 가르쳐주고 싶지는 않다.
아내나 남편은 서로에게 배우자일 뿐 결코 애인은 될 수 없다. 불륜에는 오묘한 구석이 있다. 정상적인 애인이나 부부관계보다 사랑이 '오래오래'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랑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불륜이다. 기족에 속해 있던 무리를 부정하도록 만드는 감정이 사랑이니까 말이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감정수업 50p>
그는 힐링캠프에서 방송인 김제동 씨에게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린 아이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어른"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스피노자의 "영원한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를 어떻게 읽은 것일까.
그렇지만 신 안에는 이 그리고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영원성은 시간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시간과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며 경험한다. <에티카>
<감정수업>에 빠져있는 논리가 있다.
기쁨과 슬픔은 이행이며, 완전성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들은 완전성을 사물의 본질 자체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수업은 그것이 제대로 된다면 기쁨으로의 이행에 이르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스피노자가 기쁨과 슬픔을 정의했던 이유다.
우리는 슬픔이 더 큰 완전성의 결핍에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핍은 무이지만 슬픔의 정서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픔의 정서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활동, 즉 인간의 활동 능력을 감소하거나 방해하는 활동일 뿐이다.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스피노자는 불완전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강신주는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이 불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슬픔의 감정"이라고 했다. 그는 스피노자가 완전성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본 관점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만날 때 선택의 기로에 선다. 자신이 완전해지는 기회를 선택할까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기쁨의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차가운 이성을 선택할 것인가? <감정수업> 21p
<롤리타>의 글에서 보자. 그는 역시 감정과 이성을 나누면서 감정을 선택하며 완전해지고 이성을 선택하면 불완전해지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슬픈 감정에 지배당하는 상태에서도 완전성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만의 감정과 관련된 모모스(Momus), 불화의 감정과 관련된 에리스(Eris), 그리고 사랑과 열정의 감정과 관련된 에로스(Eros)가 대표적 예다. 그리스 사람들은 감정이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신탁과도 같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신적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수업 22p>
강신주는 감정을 신탁이라고 말했다. 신탁이라면 신이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우리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이 선이고, 반면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악이니까 말이다. <감정수업 464p>
기쁨과 슬픔은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기쁨이나 순수한 슬픔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현재의 슬픔은 과거를 기쁨으로 치장하고 반대로 현재의 기쁨은 과거를 슬픔으로 기억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감정수업 480p>
과연 그럴까. 순수하고 절대적인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슬픔을 느낄 수도 없다. 현재의 슬픔이 과거를 기쁨으로 치장할 수는 있지만 현재의 기쁨은 과거를 슬픔으로 기억하도록 하지 않는다. 현재의 슬픔까지도 사실은 현재의 기쁨의 다른 이름임을 그래서, 현재의 슬픔을 잘 이해하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기쁨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스피노자의 타당한 인식이요, 영원한 상 아래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강신주는 절대적인 기쁨과 순수한 기쁨을 잊었다.
그가 가장 중요한 감정인 기쁨(laetitia)을 48개 <감정수업>에서 빠트린 이유다.
그리고 그 이원론은 급기야 여성 철학을 배제해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항상 <에티카>를 읽을 때마다 3부에 있는 48가지의 감정을 대충 넘겼다.
이번이 48가지 감정을 다시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역시 어렵다. 비판을 하려면 좀 더 철저해야 한다는 것도 다시금 깨달았다.
감정을 철학의 주요한 주제로,
문학작품과 철학의 만남으로 연결하며
사랑을 논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시도였다고 본다.
성공한 기획이다.
그러나 지금 강신주가 자기의 성공한 기획 앞에서 다시금 슬픔에 빠진다면,
독자를 슬픔에 빠지게 한다면
스피노자가 의미한 감정수업을 다시 시작해봐야(reset)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