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진 WonjeanLee Oct 03. 2016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무거움:
아니쉬 카푸어의 몸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반타블랙 그리고 김영하의 <검은 꽃>


#1. 검은 꽃 



김영하는 그의 소설 <검은 꽃>의 제목을 그렇게 정한 이유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알라딘: 제목을 <검은 꽃>으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영하: 원고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검은 꽃'의 이미지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검은색 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동시에 세상의 모든 꽃을 섞어야 나오는 색이기도 해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검은 꽃'이 정체성의 상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책에 나오는 11명의 데스페라도(무법자), 인간 존재 일반의 운명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검은 꽃이다. 모든 것이 혼합됐을 때 나오는 색.


김영하가 언어로 이런 색을 만들려고 했다면 

이런 색깔을 실제 존재하도록 노력해온 예술가가 또 있다. 

바로 조각가이자 설치가인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62)다. 


며칠 전 삼청동의 국제갤러리에 다녀왔다. 

물질이 갖는 정신성을 탐구해왔다고 평가받는 현대 미술의 거장인 그가 

‘군집된 구름(Gathering Clouds)’이라는 제목으로 연 개인전이었다. 

설치미술 전공인 언니와 함께 가서 작가가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일명 '젤리빈' 즉  '구름문'(cloud gate)'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던 유명인이란 걸 알고 반가웠다. 


아니쉬 카푸어는 존재하면서 부재하고, 비어있으면서 차 있는 것. 

즉 참을 수 없이 가벼우면서 동시에 무거운 것을 사유하고 설치하는 예술가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 이런 주인공의 독백이 나온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pp.12-13)


아니쉬 카푸어는 '파르메니데스'적 미술가다. 

존재하면서 부재하고, 비어있으면서 차 있는 것의 조화를 논한다. 

무엇보다 그것을 여성의 몸처럼 의인화해 보여준다. 

그에게는 건축물이 벽면이 모두 그런 몸이다.  

존재하면서 부재하고, 비어있으면서 차 있다. 

이 두 가지의 속성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2. 떨어져 있으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것들


소위 유학에서 말하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雜),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離)의 원리다. 

이와 기를 서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원리/정신(principle)과 물질(material)이다. 

아니쉬 카푸어는 서로 섞일 수도 없고, 서로 떨어질 수도 없는 이와 기의 묘한 조합 상태를

건축(몸)을 통해 드러내려 노력했던 작가다. 


그리고 그 교차점을 표현하기 위해 

김영하가 검은 꽃을 창작해냈다면

'반타블랙'이란 독점적 기술 색깔을 창조해냈다. 


KBS 신방실 과학기자의 기사를 보자. 



사람의 얼굴을 조각한 2개의 두상이 있다. 오른쪽은 이목구비의 굴곡이 뚜렷한 흔히 볼 수 두상이고, 왼쪽은 이목구비의 굴곡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면처럼 보이는 두상이다. 그러나 2개의 두상은 색깔만 다른, 똑같은 두상이다.

왼쪽은 무반사의 검정을 칠했을 뿐이고 오른쪽은 반짝이는 황금색 피부톤을 칠했을 뿐이다. 색깔만 다를 뿐인데 왼쪽은 입체감이 전혀 없다. 이 검정이 문제의 '독점권' 논란을 부른 검정이다. 정식 명칭은 '반타블랙'(Vantablack)이다.

'반타블랙'은 Vertically Aligned Nano Tube Arrays(수직으로 정렬된 나노튜브의 배열)의 머리글자 Vanta와 Black(검정)이 합성된 것으로,
영국의 나노 회사인 서리나노시스템에서 개발한 신물질이다.
가장 큰 특징은 세상의 검정 가운데 가장 까맣다는 것이다.
빛을 99.96% 흡수해 우주의 블랙홀만큼이나 검게 보이고,
실제로 빛을 비추면 그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 검은색이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262335



이번 국제갤러리 전시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스테인리스 강철을 뒤틀어서 만든 ‘트위스트’ 시리즈와  

까만 안료를 칠한 연작 ‘군집된 구름’이다. 

‘트위스트’는 거울 같은 표면에서 비치는 모든 것을 다 반사한다. 

반면 ‘군집된 구름’에 칠해진 빈틈없는 까만색(아직 반타블랙은 아니라고 한다)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짙은 검은색으로 표현돼 깊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심연을 떠올리게 한다. 


카푸어는 “반타블랙은 새로운 종류의 물질로 우주에서 블랙홀 다음으로 가장 어두운 검은색이라고 한다. 

저는 그 물질과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 측면에 매우 관심이 많다. 

너무나 까매서 거의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고, 표현할 수 없다고 느껴질 정도의 색이다. 

마치 꿈같은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색이다. 

아직 작품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 물질을 사용하기 위해 현재 개발팀과 연구 중이다. 

수년 내 가능하리라고 본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구름은 비현실적인 요소가 담겨있는 오브제”라며

“물성이 만들어내는 초월적, 정신적 요소가 반영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문제를 풀어보자


위의 문제는 대표적인 두뇌개발 문제다. 카메라맨에게 진흙으로 볼록하게 만든 것을 촬영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렇게 찍어왔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은 볼록한 게 아니라 오목한 것을 찍어왔지 않냐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이 원리를 아니쉬 카푸어는 잘 활용하고 있다. 





중앙데일리 문소영 기자는 그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분석한다. 

 2012년 리움에 전시된 My body Your body, 사진출처:문소영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2012년 리움에 전시된 When I am pregnant, 사진출처:문소영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그의 말대로 그의 작품은 텅 빈 공간 void는 아무것도 없는 부재 nonexistence의 공간인 동시에 비물질적인 것-암흑과 무한과 그에 대한 인간의 감정이 존재existence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물질적 사물은 비물질적 상태를 지니고 있어요. 나는 그런 상태를 찾고 구합니다.
every physical object has nonmaterial conditions. I look for those conditions."

그는 관람자에게 "깊은 어둠 속으로, 자궁으로, 우리가 나온 그곳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tumbling into deep darkness, a womb from where we have come" 느낌을 줄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말초 감각을 건드리는 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자궁, 우리가 나온 태초의 곳, 나아가 우주의 기원, 무한의 어둠과 죽음인 동시에 폭발하는 생명력이 응집된 곳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012년 리움에 전시됐던 void의 초기작 untitled, 사진출처:문소영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리움에 걸렸던 The Healing of St. Thomas. 사진출처:문소영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문소영 기자는 이어서 말한다. 


Artist's Talk에서 아니쉬 카푸어는 왜 작품을 그렇게 크게 만드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면서
그것은 관람자에게 숭고함의 느낌을 제대로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성 토마의 치유.
이 벽의 붉은 틈새는 대체 무엇일까 하고 갸웃하다가 제목에 나오는 성 토마를 보고 이해하게 됐다.
이런 흔적을 성흔(聖痕) 또는 스티그마타 stigmata라고 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 제목은 성 토마의 치유다.
그는 의심에 대한 얘기보다는 의심으로부터의 치유를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형태적으로 움푹 파인 그 상처는 동양사상의 음양, 중 여성성이며 치유를 준다는 점에서
여성적 생명력, 세상의 기원과 같다는 것이다.
이 순간 벽은 그리고 건축물은 상처 입은 몸이자, 우리를 감싸는 몸이 되는 셈이다. 


2016년 국제갤러리에 설치된 거대한 트위스트 원통 모형, 가까이에 서면 자코메티같이 길쭉하고 새같은 모습의 날씬한 모습이 비춰진다. 


2016년 국제갤러리에 설치된 Gathering Clouds, 반타블랙은 아니지만, 오목거울 모양의 그림에 블랙을 칠해 평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여성적이다. 관념적이다. 감각적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은 매우 복합적이다. 


아니쉬 카푸어는 유태인 어머니와 인도인 아버지 사이에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19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간 후로 줄곧 조각을 통한 철학적 사유에 몰두해 왔다. 

그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김영하가 말한 '검은 꽃'처럼 모든 정체성이 섞여 흡수하고 있는 모양새다. 

동양적 선과 강렬한 색상의 안료 색채가 강렬하게 조합된 느낌이다. 


눈이 깨끗해지는 느낌. 

참 좋은 전시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문학엔 정답이 없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