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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배 Dec 04. 2019

이맘때쯤엔 굴 보쌈

할머니의 김장김치와 굴, 그리고 수육

"야 너가 굴 좀 주문해라 내가 고기 삶아줄게. 굴보쌈 해먹자."

"넌 올 때 막걸리 사와. 많이."

 

주말에 할머니 댁에서 김장을 한 후 김장김치 한 통을 자취방으로 가지고 왔다. 김장김치가 있으니 역시 돼지를 삶아야지. 모름지기 김장김치에 어울리는 음식이 돼지고기 수육이라는 것을 반박할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난 수육에 김치가 먹고 싶어서 김장하러 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을 정도로 제철 별미이다. 거기에 제일 맛있을 때인 굴을 곁들이면 더 말할 게 뭐가 있겠나. 모처럼 1년에 한 번 먹을 수 있는 김장김치와 함께 수육을 삶아 먹자니 자취방에서 혼자 먹기는 좀 외로울 것 같았다. 14학번에 아직 2학년인 나는 학교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알배추에 싱싱한 굴과 잘 익은 수육을 올리고 김치에 속으로 넣다 남은 무채와 함께 싸 먹어도 좋고, 김장김치를 길게 찢어 고기와 싸 먹어도 맛있다. 냉동실에 넣어놔 약간 살얼음이 언 막걸리 한잔이면 더 좋을 수가 없다. 수육과 굴, 둘 다 주연급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김장김치다. 친구들의 입에서 김치에 대한 칭찬이 나오니 괜스레 어깨가 올라간다. 그도 그럴게 김장에서의 내 지분이 적어도 3할은 차지했기 때문이다.


자취방 굴보쌈


"아이고 우리 손주 김장하러 와서 혼자 일 다하네~"

"아니 글쎄 저 놈이 우리 손주 놈인데 일을 어찌나 잘하는지~"


할머니의 입에선 손주 자랑이 끝이 없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외갓집인 양평에 가서 김장을 하는 것이 우리 집 연례행사이다. 예전에는 김장 한번 한다 하면 대가족이 전부 모였기에 그 양도 어마어마했지만 요새는 여느 가정에서 그렇듯, 친척들도 김치를 사 먹는지 김장날이 되어도 모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덕분에 김장날이 되어도, 외가에서 가장 힘 좋을 때인  20대 청년은 나뿐인지라, 힘쓰는 일은 물론이요 이틀 동안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게 내가 되었다.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할머니의 애정을 독차지할 수 있고, 자취방에 가지고 내려갈 김치 포기의 수도 늘어났다.


김장 전날에 배추를 씻고 절여놓은 후 갖가지 양념을 미리 준비한다. 무거운 배추와 무를 나르거나 많은 양의 마늘과 생강을 절구통에 넣고 다지는 일, 채칼로 무를 채 써는 일처럼 힘든 일은 당연 내 차지이다. 김장이라는 게 손이 원체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라, 또 총대장인 할머니의 호령에 따라 절여놓은 배추도 때마다 뒤집어 줘야 한다.


김장 준비


"애들 일하는데 배고파 죽겠다! 밥은 언제 하니?"

"어휴 엄마 좀 가만히 계셔!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아빠와 삼촌과 함께 육체노동을 하고 있으면 끼니 때도 굉장히 빠르게 찾아오는데, 이는 일한다고 시간이 흐른 탓이 아닌 할머니가 엄마와 숙모에게 내리는 불호령 때문이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나이가 많이 드셔서 잔소리도 더 많아지고 걱정도 많아지셨다면서 여느 딸과 같이 할머니에게 소리친다. 하루에 족히 4~5끼는 먹는 듯해 배가 고플 새가 없다. 그래도 할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엄마와 숙모는 주방에 갇혀 하루 종일 고생하지만 할머니는 좀처럼 알아주시질 않는다. 모두의 피로를 푸는 방법은 모든 일이 끝나고 할머니가 잠에 드신 후에 조촐하게 먹는 술 한잔이다. 그제서야 서로 어찌 살아가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긴다.


"어휴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다. 내년부턴 알아서 해 먹거나 사 먹어라."


매년 김장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지만, 역시 매년 듣고 있는 말이다. 연세가 많으셔서 몸 여기저기 편찮으신 할머니지만, 김장에 대해선 칼 같으신 분이다. 김장 내내 내년엔 힘들어서 못하겠다 말씀하시지만, 떠날 때가 되어 인사를 드리면 손을 꼭 잡고 내가 일을 잘해서 내년에도 수월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딸과 아들에겐 항상 쏘아붙이듯 말씀하시지만 손주에겐 한없이 다정하신 할머니. 25살이나 먹은 나이 많은 손주지만 외갓집을 떠날 땐 항상 오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신다. 이제 용돈은 안 주셔도 괜찮다 말씀드리지만, 지폐를 쥐어주시는 할머니의 표정엔 많은 감정이 들어있기에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받을 수밖에 없다. 할머니 표 김치를 워낙 좋아해 우리 집 김치 소비량 1위를 자랑하는 나이기에 더욱 감사한 마음이다. 김치와 같이 고기도 삶아 먹었으니 내일은 할머니에게 김치가 너무 맛있다고 전화나 한통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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