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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Jul 10. 2019

미국에서 새로 일을 시작하며

취준은 언제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2017년 10월 26일, 3년 하고도 10일간 근속했던 외항사를 떠났다. 그리고 대략 한 달이 지나 무작정 미국에 관광비자로 들어왔고, 신분 전환 과정을 아직도 밟는 과정 중에 있다. 다행히 USCIS로부터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는 온라인 통지를 최근에 받고 무척 들떠있다. 곧 그린카드(영주권)를 받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벌써 미국에 들어온 지도 1년 8개월 차다. 가장 큰 실수는 신분 전환이 빠르게 이뤄졌다는 과거의 사례를 잘못 참고하여 노동허가 등을 금방 받을 줄 알았으나 그렇지 못한 결과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는 점이다. 더구나 중간에 짝꿍이 여러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내 신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다시 가고 싶었던 최초의 계획도 각종 사건 사고가 터지며 예금은 야금야금 줄어갔고,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 쥐고 있던 마지막 정신마저 놓아버린 상태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취업 도전기


 우여곡절 끝에 노동허가증을 수령하고 취업이 가능한 상태로 전환된 지가 어언 5개월 여 전의 일이다. 노동허가만 받아봐라, 당장 취업해서 어쩌고 저쩌고 포부가 넘쳐났던 것과 달리 현실은 또다시 취업준비생이 된 어둠 속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취업 준비 시절에 느꼈던 좌절감이 엄청났었기 때문에 설렘은 오래가지 않고 금세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더군다나 꼭 마음에 드는 곳들과 직무 위주로만 레주메를 넣고 연락을 기다려 보았으나 실제 관심을 보인 회사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또다시 좌절감을 느끼며 한국에서 취준 시절 느꼈던 트라우마가 재현되고 있었다. 취업 때는 여러 상황이나 운 같은 것들도 작용하고 선택받지 못했다 해서 주눅 들 필요가 절대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자신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진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남한테 말은 해줄 수 있을지언정 정작 나 자신에게는 적용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대략 5년 정도의 사회생활 경험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막상 레주메를 쓰다 보니 한숨이 나왔다. 1년 반 정도를 코스닥 상장 중견기업 기획팀 아래 IR과 공시 업무를 담당했었고, 이후 에미레이트에서 이코노미를 거쳐 비즈니스 승무원으로 총 3년간 비행했다.  당시 직장 생활을 접으며 승무원으로 갈 때 했던 모든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승무원으로 일한 것이 물론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3년간 일하며 쌓은 것은 서비스 경력. 제 아무리 비즈니스 진급이 빨라 프리미엄 서비스를 했고, 개근으로 받은 상장이니, 칭찬 레터가 몇 개이고 적어봤자, 결국은 소프트 스킬 이상의 무엇은 없었다. 고용주 입장에서 볼 때, 당장 업무에 투입 가능한 인력이라 보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되려 1년 반 동안의 직장 생활에서 내세울 게 더 많았다. 차라리 한국에 갔더라면 영어를 곧잘 한다는 점에 덧붙여 나름 돋보일 수도 있는 경력이었으려나, CS 계통으로 진입하거나 혹은 영어와 승무원 준비에 관계된 교육 시장이 비대하니 먹고 살기 나았으려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이곳에서는 아무나 다 하는 영어에 어딘지 꼬여 있는 경력을 어떻게 봐줄지 점차 자신감을 잃어만 갔다. 모아둔 돈으로 학교를 가고 싶었었는데 그냥 부딪혀 일을 시작하고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희망사항으로는 사무직 경력을 일부 연결하여 미국에서 회계 관련 업무를 맡기를 희망했고, 그렇지 않다면 서비스 경력을 살린 업무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게 그야말로 희망사항이 되었다. 대부분의 회계 관련 업무는 조건이 기대선에 어느 정도 충족되어 지원을 해보면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공항의 대다수 서비스 직종은 엔트리 잡의 경우 페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 구미가 당기지 않았고, 매니저급으로 가기에는 직장에서 리더 격의 자리를 맡은 적은 없었으니 스스로가 부족한 측면이 있어 어렵기만 했다. 그즈음 사업을 하고 있는 짝꿍부가 직접 레주메를 주변 지인들 사업체에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그 집에 개인 사정이 터지면서 내 일을 봐달라 읍소하기가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한국에 남겨뒀던 마지막 예금을 끌어오며 목구멍이 말 그대로 포도청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거의 1년 반도 넘게 수입이 0인 상태로 살았다. 퇴사하며 다들 참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았냐 입을 모아 말했던 그 저금이 바닥 직전이 됐다. 허무했다. 짝꿍은 아직도 일터로 나가기에 미진하였기에 내가 반드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게 기대치를 일부 낮춘 뒤 면접을 보게 된 한 포워딩 회사에서 현재는 항공 수입 관련 일을 시작한 지 4주가 저물어 가는 상태다. 현재는 그야말로 나이가 기본 4-6살씩이나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신입과 다름없이 일을 배우는 중이다. 그래도 일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나아갈 길을 다시 계획하고 꿈꿀 수 있다는 것이, 그간 억눌렸던 나 자신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있다.


 너는 정말로 괜찮아??


 사실 그간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 짝꿍과 24/7을 붙어 있으며 힘들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정말로 어떻게 보면 참 신혼 1년 차라면 보통 행복할 텐데, 생애 가장 짙은 암흑기라 불러도 될 만큼 많이 힘들었다. 가까운 친구들이나 친언니처럼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주절주절 수다 끝에 꼭 묻곤 했다. 너는 정말로 괜찮냐고.


 한 번은 다투다 공황 발작으로 과호흡이 와 무척 당황했었다. 승무원 시절 메디컬 케이스로 다루던 그 과호흡을 내가 겪었네 싶었다. 그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짝꿍 눈치를 보느라 가장 심하게 심적으로 고통받았을 때는, 그가 저기압일 때 대면해야 하는 일이 큰 두려움으로 다가와서 숨이 가빠지며 말을 더듬고 손이 떨리는 증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 도시에 오랜만에 비행 온 친구를 만나 그녀의 레이오버를 함께 하며 이런저런 사연을 털어놓게 되었다. 친구는 나를 염려하며 당장 한국에 돌아가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지독하고 지루하게 서로에게 묶이다시피 한 생활 안에 갇혀 있다 친구를 만나 바라보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스스로가 변해 버린 것 같았다. 두렵기만 했고, 의지도 약해져 갔고. 소심해졌고, 더구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거나, 자격증 등을 위해 하던 공부 같은 것들도 예전처럼 해내기가 어려워졌고, 할 수 없을 거라는 마음만 강해져 있었다. 정말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항상 진취적이고 계획적이며 뭐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 꿈을 좇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졌고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웠다.


 친구와의 짧은 일상 탈출 후, 상태는 더 악화됐다. 그러다 어떤 일을 계기로 짝꿍이 짜증을 잔뜩 낸 뒤 방문을 쾅 닫으며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부엌에 서 있던 나는 엄청난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발작을 일으켰다. 과호흡이 오면서 부엌 바닥에 쓰러져 의지와 달리 옴짝달싹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 동물이 꺽꺽대는 소리만이 나오는 일종의 실어 상태가 오랫동안 이어졌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에서 나오다 나를 발견한 짝꿍이 달려와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엄마를 울부짖으며 찾았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충격과 이후의 당혹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약하게 느껴지는 나에게 실망스러웠으며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은 더 보태지기만 했다. 그 역시 크게 놀라 거의 울먹이며 내가 다치는 것은 원치 않으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까지 했다. 그럴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그런 상태에 대한 이유는 알고 있었으니 상황이 조금만 더 좋아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게 두 번의 공황을 겪는 동안 시간의 흐름도 더해졌으니, 그 시점 즈음부터 짝꿍도 약물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며 전보다 훨씬 기복이 덜하고 우울한 상태도 좀 나아지는 듯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짝꿍이 좋아져서 나도 좋아진 건지, 나의 그런 모습 때문에 짝꿍이 더 애써 좋아지려 노력한 건지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좀 더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해서. 혹은 나의 심리 상태를 염려해 이제는 나로부터 스스로를 더 감춰 버리게 된 것은 아닌지도 한 편으론 신경이 쓰인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주말 부부로 지내며


 밖으로 나와 활동하고, 일을 하기 시작하며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며 다쳤던 마음도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쪼그라들었던 나였었다. 지금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미래에 대해 계획하고 실천할 만한 여건이 마련된 느낌이 들어 든든하다. 매일매일 바쁘고 정신없지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짝꿍과도 주말 부부처럼 지내며 관계가 훨씬 회복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되려 대화도 더 많이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걱정인 것은 그가 혹여 홀로 외로움을 느낀다거나, 나를 낯설게 받아들인다거나, 스스로를 억지로 감추지 않았으면 하는데 어떤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다시는 그의 우울증이 극단의 상황으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데 항상 걱정스럽다. 꾸준히 짝꿍에게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본인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 앞으로 해결할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부디 부담스러워 말고, 함께 헤쳐 나가자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가끔은 사소한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버겁게 느껴지면 그냥 나한테 해결해 달라고 말해도 괜찮다고도 했다. 어쨌든 수입이 고정적으로 생겼으니 본인이 하고파 했던 꿈들을 좀 더 안심하고 펼쳤으면 하여 조금씩 등을 떠밀어 주고 있기도 하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앞이 깜깜했는데, 그야말로 칠흑 같았던 터널을 막 뚫고 나온 것만 같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다시 달릴 때이지 않겠는가. 우여곡절은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그래도 이만큼 온 우리가 무척 장하다. 계속해서 더 장한 우리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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