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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Sep 18. 2019

영주권(그린카드)을 받아 들고

미 시민권자 배우자 영주권 인터뷰

 "Oh, so this card is actually green color!"


 그린카드, 그린카드.. 하는 그 그린카드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노동허가(EAD: Employment Authorization D) 카드는 분홍색이었는데 이 카드는 확실히 초록색이었다. 그래서 그린카드라고들 부르는 것이었구나.


 이 카드를 받기까지 얼마나 험난하였던가. 허탈하고 허무하기까지 하였다. 미 시민권자와의 결혼으로 인한 신분 조정의 경우, 혼인신고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면 2년 기간의 임시 영주권을 부여받게 된다. 2년이 넘은 경우이거나 자녀가 있다면 10년짜리 일반 영주권을 부여받을 수 있다. 내가 이번에 받은 것은 2년으로 조건이 붙은 임시 영주권이다. 향후 만료 90일 전에 조건부를 소거하고 일반 영주권으로 전환하는 절차를 재차 밟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이라는 안도의 시간이 반갑다.


 미 시민권자 배우자 영주권 인터뷰


 배정된 인터뷰 시간이 오전 7시 15분이었던지라 새벽같이 서둘러야 했다. 대략 6시 40분쯤 건물에 도착하였는데 현장에는 그 이른 시간부터 보안 구역을 통과하려는 줄이 기다랗게 늘어서 있었다. 7시가 넘어서야 보안 구역을 통과한 우리는 통지서에 안내된 Room#를 찾아 이동했다.


 가로막힌 창 안의 직원에게 인터뷰 통지서를 내밀었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이름이 불릴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 특유의 풍경은, 두바이에서 미국 승무원비자/관광비자 인터뷰를 하러 갔던 곳과 거의 비슷해서 오피스를 일부러 동일한 디자인으로 배치하나 보구나 했다.


 아침부터 낯선 길을 찾아오느라 한 바퀴 돌았던 데다, 주차장도 입구를 못 찾아 헤매었던 지라, 짝꿍은 이미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주섬주섬 챙겨 온 서류더미 안에는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Q&A를 모아 출력해 둔 것도 있었는데 한 번 같이 보자고 말을 건네기도 찬바람이 불어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대기했다. 주말 부부를 하며 나는 주중에 시어머니 댁에 머물며 일을 다니고 있다든지, 돌아가신 아버지 명의의 집에 머물며 상속 절차를 밟아야 하는 지라 현재로서는 추가적인 공동 명의의 고지서라든지 여러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준비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까지도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심장이 목구멍 위로 올라온 것 같았다. 갑자기 온갖 복잡 미묘한 감정이 몰려들고 있었다.


 퍼스트 네임도 라스트 네임도 원어민에게는 어려운 이름인지라 심사관이 더듬대며 이름을 외친다. 한두 시간 대기는 기본이라 하는 후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침 일찍에 잡혀서인지 밀리지 않고 거의 제시간에 불렸다. 키가 작고 품이 좋은 멕시칸 아주머니는 밝게 웃어 보였고, 나 역시 긴장은 바짝 되었지만 더 환히 웃어 보이며 심사관을 뒤따랐다. 그녀의 오피스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ID라든지 기초적인 서류를 먼저 제출한 뒤, 짝꿍부터 질의가 시작되었다. 여러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기본적으로 배우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게 해 달라는 청원권자로서 충분히 재정적으로 뒷받침 가능한 지를 집요하게 물었다. 우리 케이스는 그 부분이 가장 미심쩍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1년 반에 가깝게 무직인지에 대해서 묻다 그녀가 짝꿍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Why don't you work?"


 슬슬 차가워지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초조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Well, because I don't want to do shitty jobs?"

 "But you need to work. Sometimes you have to do what you don't really like."


 어이없다는 듯 기분이 상해버린 그에게 여전히 심사관은 몰아붙이는 태도로 짝꿍이 이 영주권 신청 케이스에 있어 보증인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시어머니 자리로부터 재정 보증을 추가로 받아야 조건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경우 보증 책임의 절반은 시어머니가 지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심사관은 작정한 듯 제대로 심기를 건드렸다.


 짝꿍이 현재 무직인 상태라는 점, 그런데 내가 대부분의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고 현재도 일하며 가장 노릇을 한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문제인지 싶었다. 오히려 부부로서 더 책임을 나누고 있으니 더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심사관은 콕 집어 그리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라고, 얼마나 많은 가짜 결혼이 존재하고, 대부분 영주권 혜택을 받는 쪽이 엄청난 금액을 시민권자에게 지불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금전의 흐름을 볼 때, 너희들 케이스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가 가져온 대부분의 증거들이 사진이나 오래된 관계와 같은 정황적 증거는 있으나 실질적으로 연인 관계를 넘어 가정을 이뤘을 때 가능한 증거들이 태부족한 상태였다.


 바로 그 점이 그녀가 확실히 하고 싶었던 점이었다. 충분히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있고, 우선 2년짜리 임시 영주권이기에 일단은 긍정적인 결정을 내려주겠다고 했다. 새로운 시대이니 아내가 가장 노릇을 하겠다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 일은 아니지만 청원자와 수혜자의 관계를 고려할 때에 정황적으로 애매한 부분이 있으니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겠다고 했다. 2년 후에, 아마 또다시 인터뷰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때까지는 좀 더 확실하게 가정을 이뤘다는 증거들을 가져오라고 말이다.


 심사관은 마침내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처음 보였던 푸근함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울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1년 반 동안 고생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정말로, 많은 것들이 안정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닥을 딛고 올라가고 있음이 확실히 증명된 듯했다.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요즘이다.


 법적으로 안정된 신분이 갖는 의미


 참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았는데 영주권을 받아 들고, 법적으로 안정된 신분을 획득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한국에서, 당연한 한국인으로 지내면서는 몰랐을, 두바이에서 에미레이트 항공의 스폰서로 워킹 비자를 받아 안정적으로 일하면서는 몰랐을 어떤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대체 미국이라는 나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읍소하듯 신분을 얻어야 하나 싶다. 특히나 잠재적인 범죄자 비슷한 것으로 가정하고 취조하듯 하는 고압적인 태도에 대해 워낙 많이 들어왔던지라 콧대 높은 미국이 무척 얄밉게도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내가 영주권을 얻고자 하나 싶은 건데,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으니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싶다가도 저자세를 취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묘한 반발심을 건든다.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을 비롯, 미국에는 다양한 한인들이 있다.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 이민을 와서 시민권까지 획득한 사람, 영주권을 소지한 사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 J1 인턴 비자로 일하는 사람, 미국에서 F1 비자로 학업을 마치고 OPT 비자로 일하는 사람, H1B 비자를 받은 사람, 회사로부터 영주권 스폰서를 진행 중인 사람 등등.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잠재적으로 신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미국 생활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직장 선택이든, 일반적인 생활에 있어서든, 전반적인 운신의 폭이든 모든 것들이 신분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당연한 한국인으로 살아갈 때는 부딪히거나 고려할 필요가 없는 문제가 추가되니 신분 문제 해결은 지상 제1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영주권을 얻고자 애쓰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리하여, 국적에 대해 고찰할 시간을 가졌다면, 혹은 당연하게만 느꼈던 국적 개념에 감사함을 느꼈다면, 다른 나라에서 영주권을 받겠다며 애를 쓴 사실과는 배치되는 이중성으로 보일 수도 있을까. 대한민국의 국적 경계를 뛰쳐나온 선택의 주체는 어쩌면 나였는데, 비록 결코 자발적으로 원치 않은, 결혼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나라로부터 한 발작 멀어지게 되니 내 나라의 존재에 대해 한 번 더 바라보며 이런저런 감상에 빠진다. 모든 감상을 뒤로한 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분 가지고 나처럼 모험을 하지는 말아한다는 점이다. 모험을 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버린 1년 반에 대한 보상은 아무도 해줄 수 없으니 말이다.


 영주권을 받아 들고, 이제 국경도 넘나들 자유를 얻긴 했지만 언제쯤 한국에 다시 돌아가 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목을 빼고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지만,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새롭게 시작하고 나름의 자리 잡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다 보니 말이다. 떠나기 전에, 마무리 지을 것은 미리 짓고 가라고 입이 닳도록 하신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던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제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우선순위가 마구 뒤섞인다. 그래도 언제쯤 한국에 갈 날을 받아볼 수 있으려나 고민이나마 해볼 수 있게 됐으니 그러한 사실에 그저 무한한 감사함을 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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