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정 Oct 22. 2021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해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그리고 <헝거게임>

<오징어 게임> 생각 없이 보다가 은은한 불편함이 스믈스믈 몰려들게 되는 드라마였다. 소위 지배층이라는 사람들이 꾸며놓은 살인 게임에 <헝거게임> 급의 서사와 철학을 부여할 것인가, 단순히 <배틀로얄> 처럼 피가 튀는 잔혹함으로 은근한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오락 영화를 만들 것인가 사이에서 감독은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서사와 철학 적당히, 잔혹함도 적당히.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다 담았다기에 철학은 빈약했고, 잔혹함은 유머를 잃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 결말에 대한 스포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의 희열은 그 영화가 얼마나 나의 현실과 닮아있는가, 그리고 그 현실을 주인공은 어떻게 겪고, 또 때로는 극복해 나가는가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결국엔 인간 사회를, 인간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주인공을, 그리고 거기에 투영된 나 자신을 인간답게 하는가. 이 인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그 중 하나가 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징어 게임>을 생각없이 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약간의 씁쓸함을 느낀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와 골든 글러브를 휩쓸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주인공 기훈은 게임의 관리자들에게 "거, 이건 너무한거 아니오!!!" 라고 항의하지만, 결국 그 무엇도 자기 힘으로 바꾸지 못했다. 그나마 잔인한 게임속에서 그가 지켰다고 볼 수 있는 '따뜻한 마음(그것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선택적으로 발휘되지만)', 그 마음만으로 게임의 우승자가 되었다. 그 반증으로 그는 우승 상금을 한푼도 쓰지 않는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머리를 갑자기 염색하고, 게임 관리자에게 자기가 찾아갈테니 기다리라는 호기로운 말을 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성의 승리라고 자축해야 될까? 결국 기훈이 게임을 깨부술 거라고 희망을 걸어보면 될까? 하지만 기택이 정사장을 죽이고, 그 대가로 자신이 벙커로 숨어들게 되는 장면이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게임을 관리하는 관리자는 이 게임은 평등하다고 한다. 그래서 몰래 사망자들의 장기를 적출하여 내다팔다 걸린 일당을 죽이고 효시 한다. 하지만 이 게임이 정말 평등할까? 다리가 불편해 달릴 수 없는 사람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하다가 죽을 수 밖에 없고, '뽑기 게임'은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다. '줄다리기'는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불리하고, '구슬치기'는 선량한 마음으로 상대를 믿었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게임이다. '유리 다리 건너기'는 말할 것도 없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게임을 이겨보려고 하는 상황을 관리자는 두고보지 않고 오히려 패널티마저 준다. 관리자는 게임에 개입하지 않는 척했지만, 다 거짓말이다. 심지어 밤엔 게임 결과와는 상관 없이, 나보다 강한 완력을 가진 사람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언뜻 평등한 것 같지만 실은 불평등한 오징어 게임의 세상은, 우리가 사는 현실 그 자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 세상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나는 몰릴대로 몰려서 죽기 일보 직전이지만, 적어도 게임 세상에서는 내가 살아 남으면, 엄청난 보상이라도 지급이 되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의에 의해 나갔다가 홀린 듯 게임 세상으로 돌아온다. 현실의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 몰골이 되었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히 이유가 있을텐데, 참가자들은 이유를 잘 생각하지 못한다. 관리자들의 얼굴이 가려져 그들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도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기생충>에서 기생충은 기택의 가족이다. 일가족이 사기로 박 사장 집의 고용인이 된 것도 모자라,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마음껏 그들의 재화를 축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이 숙주로부터 쟁취했다고 생각한 것 모두 사실은 허상이고, 그들이 실재 하는 곳은 하수구가 역류하는 반지하다. 불이 켜지면 어둡고 습한 곳을 찾아 사라져버리는 바퀴벌레들처럼 박 사장이 돌아오는 순간 그들 역시 반지하로, 혹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지하 벙커로 숨을 수 밖에 없다.

 

기생충 스틸컷


무엇이 우리를 기생충으로, 또는 게임판의 말로 만들었을까?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좋은 일자리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경쟁하고, 그 게임에 탈락한 사람은 가차없이 밀어버린다. 언뜻 보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장 공정하다는 국가 시험 마저도 부모의 직업에 따라 합격률이 갈린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시험을 통과한 우리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내가 더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릴 통과하게 만든 것들은, 대부분 운칠기삼으로, 적당한 운과 다른이들의 도움, 그리고 약간의 노력으로 얻은 것일 뿐이다. 게임 참가자들이 게임을 통과했을 때처럼.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이 불합리함에 대해서 지적하지는 않는다. 내가 게임에서 통과 했다는 것만 중요하지 이 게임이 잘못됐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들끼리 아등바등 '오징어 게임'을 하는 사이 뒤에서 웃는 것은 이러한 게임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 소위 '상위 1%의 사회 지도층'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이 거대한 게임의 관리자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 게임을 바꿀 생각이 없다.


<오징어 게임> 흥행이 씁쓸한 것은 바로  지점이다. <기생충> 그랬듯 <오징어 게임> 우리가 그냥  게임을,  법칙을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게임을 만든 사람에게 맞서는 '캣니스 에버딘'   작품에는 없다. 초등학생들이 <오징어 게임> 따라하며 폭력적인 놀이를 해서 우려가 된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임이 잘못됐다는  지적하는 사람은 작품 내내 한번도 나오질 않으니까. 그래서 나라도 얘기해본다.  게임은 불합리하다.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고 죽이게 만드는 잔인한 게임이다. 게임에 이긴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의 목숨 값을 자기 맘대로   있는 것도 불합리하다. 럼에도  게임의 우승자결국 주인공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정작 게임에 저항하기 위해 뭔갈 해본 적이 없고, 게임은 계속 열리고 있다는 결말남긴다. 그가 관리자의 일부가 될지, 아니면 주최자들을 박살낼지는 알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는 실패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헝거게임은 시작부터  게임이 무작위 추첨인  하지만, 사실은  이름을 추첨함에 넣는 대가로 먹을것이 주어진 다는 것을 알려준다. 캣니스는 추첨함에 이름이 가장 많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동생이 자기 대신 참가자로 선발되자 결국 게임에 자원한다. 캣니스는 처음부터 캐피톨의 지원자들, 좋은 인상을 주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활을 겨눌 정도로 게임에 크게 반발심을 갖고 있었으며, 가장 약한 어린 소녀의 희생을 기리며 게임에 분노하던 사람들의 저항심을 자극해 혁명의 불씨를 당긴다.


자신과 피타가 남았을 때, 둘이 함께 동반 자살 하는 그림을 연출하여 결국 최초로 게임에서 동반 우승한 조공인이 되고, 이후에는 혁명군에 속하긴 하지만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피타를 구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에만 충실한다. 그리고 캐피톨을 향한 증오를 불씨 삼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으려던 혁명군의 코인 대통령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혁명의 프로파간다였던 자신은 뒤로하고, 그냥 초야에 파묻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길을 가게 된다.


우리 모두가 '캣니스 에버딘'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캣니스처럼 이 게임이 말도 안된 다고 얘기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죽어야 할 것은 우연히 이 게임에 참가하게 된 우리가 아니라, 이런 게임을 벌이고도 우리를 두고 내기를 하며 낄낄 거리는 저 거울 유리창 너머의 VIP 들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의 털 끝도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들을 둘러싼 그 유리창에 구멍하나 쯤은 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서로 함께 힘을 합친다면. 우리가 서로를 소중히 여긴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 지옥은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