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지옥,2021> 그리고 <사바하, 2019>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어느 날 강의실에서 학생에게 인류 문명의 시작이 시작된 단서가 뭐라고 보는지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 그는 15,000년전 발견된 인간의 대퇴부 뼈 화석이라고 대답했다. 그 화석은 대퇴부가 부러졌다가 나은 흔적을 가진 화석으로, 인간의 대퇴부는 신체에서 가장 크기가 큰 뼈로써 이게 부러지면 인간은 걸을 수 없다. 그런 인간이었다면 당연히 무리에서 떨어져 자연사 하는 게 원시시대의 법칙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인간의 주변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휴식하고 낫는 동안 그에게 물과 식량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의 뼈는 다시 붙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화석이 현대에 와서 우리에게 발견되었다.
언뜻 너무 감상적이라고 느껴지는 일화이지만, 인간들은 고대부터 약자를 배려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나에게 이득이다. 나도 언젠가 저 사람처럼 다리뼈가 부러질 수 있으니말이다. 프란스 드 발의 '착한 인류' 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침팬치들은 표범이 덤비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구한다. 다람쥐는 소리로 다른 다람쥐들에게 위험을 경고한다. 코끼리는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쓴다. 동물들은 왜 다른 동물들을 돕는 행동을 할까?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 모순되는게 아닌가? p. 52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의 윤리는 자연상태에서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 중 한 사람이다. 드 발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사람들은 선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은 허술하다. 드라마는 갑자기 사람들이 미지의 존재(일명 천사)에게 지옥에 간다는 날짜와 시간을 통보 받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일거라는 대중의 순진한 기대가 무색하게 천사가 정한 날짜, 시간에 3명의 괴물에게 잔혹하게 살해 당하는 여성이 전국으로 생중계 된다. 사람들은 겁에 질리며, 일찌기 이런 천사의 고지와 사자의 집행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적으로 이를 해석하며 영향력을 갖던 '정진수'가 이끄는 새진리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사자가 죽음을 집행하는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법으로는 그 죄를 심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너무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반성하지 않아서 신이 개입해서 직접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 신의 심판이 행해진 후, 새진리교는 한 여성이 희생 당하는 장면을 최초로 생중계 하는 데 성공한다. 신분을 보호하기로 한 계약이 무색하게도 새진리교를 몰래 추종하는 내부자들이 몰래 정보를 흘려서 피해자의 신상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죄인으로 조리돌림 당한다. 심지어 그 자식들까지도 인터넷에 다 공개되어 외국으로 도피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교주라는 사람은 이런 부조리에는 침묵한다. 그리고 자신의 '심판'이라는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과거 죄를 지었지만 정신질환으로 감경을 받은 어떤 살인자를 똑같이 불에 태워 죽이고 시신을 유기한다.
사실 초반에 나온 3건의 살인 중 한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개에는 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그냥 죄인이라서 죽나보다 하고 무비판적으로 새진리교를 믿기 시작한다. 맹목적으로 믿는 것도 넘어서 그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화살촉'이라는 단체도 등장한다. 새진리교의 교리에 조금이라도 반대되는 주장을 하면 이 단체에 의해 모두 납치 되어 잔인하게 폭행당하거나 혹은 살해 당한다. 그리고 이게 무서워서 아무도 새진리교의 모순에 대해 입도 뻥긋 못한다.
어찌나 무서운지 몇 년째 정치, 경제, 언론까지 이 사이비 종교에 장악이 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재앙같은 죽음의 원인이 뭔지 밝혀질 수 있는 단서들은 다 맥거핀으로 소모될 뿐이고, 후반부 교수 한명의 독백 속에서 겨우겨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실체는 뻔하고 허무하다. 심지어 그 지옥을 끝내는 것은 부모님의 숭고한 희생이라는 뻔한 신파다. 누군가의 무고한 희생이 아니면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특히 그 희생의 주체가 부모라는 것은 정말 썩은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장면 장면마다 구현하는 이미지(자극적인 이슈몰이로 먹고 사는 스트리머라던가)는 현실의 모습과 퍽 닮아 있으며, 그것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기억에 남는 것은 감독이 신경써서 구현한 폭력적인 이미지들 뿐이다. 결국 새진리교가 영향력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폭력이다. 폭력으로 모든 것이 장악된 세상. 이게 연상호 감독이 생각하는 지옥의 모습인가보다.
하지만 이런 지옥에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역사 속에서 겪어왔고, 또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 까지도 알고있다. 그럼에도 현실은 연상호 감독이 그려낸 '지옥'과는 다르다. 원시시대 허벅지 뼈가 부러진 동료를 보살피듯, 동물들이 서로를 보호하듯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법을 알고 있다. 물론 알면서도 눈앞에 이익에 눈이 멀어, 또는 공포심 때문에 폭력에 굴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폭력은 부당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전혀 신선하지도 않고, 아무런 철학도 없으며 공허하다. 중세시대 성당에 가면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려두던 무시무시한 지옥도와 다를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바하>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잘 짜여진 수작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며 그 메시지는 제법 깊이가 있다. <사바하>는 지옥이나 심판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구원을 다룬다. <사바하>가 말하는 지옥은 피가 낭자하는 폭력의 세상이 아니라 지독한 고통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거기엔 그리고 오로지 나 혼자 뿐이다.
<사바하>의 주인공인 박 목사는 이단을 추적해서 주요 교단들에 알리고, 그 댓가로 수익을 내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사슴동산'이라는 신흥 이단 종교를 쫓으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언뜻 박 목사는 예수도 부처도 믿지 않는 냉소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구원을 바라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계속해서 사이비 종교 단체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런 갈망의 연장선이다. 그는 처음으로 '사슴동산'의 교주 김제석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후배에게 '김제석은 진짜'냐는 질문을 한다.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겪었기에, 그 고통을 겪게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는지, 그 신이란 존재의 뜻은 무엇인지 그는 간절하게 답을 얻고 싶어한다.
또 하나의 축을 맡고 있는 것은 바로 온 몸에 털이 수북하고 짐승처럼 태어난 '그것'과 '그것'의 쌍둥이 동생인 '금화'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뱃속에 있을때 언니로부터 공격을 당해 다리를 다친 금화,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 못했단 이유로 창고에 갇혀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살아야하는 '그것'. 금화는 쌍둥이 언니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여러차례 이사를 다녀야 하고 또 그것을 가둘 창고를 지을 수 있는 시골에서만 살아야해서 친구도 없고, 또래들이 하는 것들은 하나도 해본적이 없다. 그래서 금화는 도시를 항상 동경하고 있다. 자신의 다리를 그렇게 만든 쌍둥이 언니와 그 언니 때문에 집단적으로 광기에 빠져버린 가족. 금화는 '그것'을 죽이고 자신은 서울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길 원한다. 그렇게 하면 본인이 자유롭고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하나 더 있다. 바로 '사슴동산'에서 일종의 사제 역할을 하는 '정나한'이다. 어린시절 범죄를 저질러서 소년원에서 간 나한은 그 곳에서 '사슴동산'을 만든 교주 '김제석'을 만난다. 그리고 김제석에 의해 처음으로 본인이 구원 받았다 느낀다.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생각했는데, 그런 그를 김제석이 구렁텅이에서 꺼내어 쓸모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김제석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의 지시를 수행하며 살지만 매일 악몽을 꾸며 하루하루를 괴롭게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김제석이 시킨 일을 모두 완수해야만 본인이 구원을 받고 편안해 질 수 있을거라고 믿고있다.
세 명의 공통점은 모두 각각의 결핍과 상처를 갖고 있고, 거기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의 방법으로 그것을 실현하려고 한다. 사이비를 찾는 척 사실은 진짜를 찾고 있는 박 목사나, 가족으로 얽힌 질긴 인연을 어떻게든 끊으려는 금화, 그리고 잘못된 진리를 믿으면서 죄를 짓고 있는데, 오히려 구원 받을거라 착각하는 나한까지. 구원에 대한 그들의 서로 다른 바람은 '사슴동산'의 교주인 김제석으로 향한다. 김제석은 흔히 말하는 '생불'로서 살아서 깨달음을 얻어 그 자신이 부처가 된 사람이다.
<사바하>가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신은 극한의 선 그 자체이다. 누구나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도를 깨우치면 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흥함이 있으면 쇠함이 있고, 쇠함이 있으면 다시 흥함이 있다. 쇠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만이 구원이며 신이라 주장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야차이다. 그러나 죄를 많이 지은 야차라고 할지라도 근본에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과오를 뉘우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영혼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지옥>에서 사이비 교주인 정진수가 자신을 추종하는 청소년을 타락시키는데 이용하는 것이 바로 사적인 복수심이다. 자신이 행한 사적인 심판에서 정진수는 그 청소년을 이용한다. 어린시절 엄마가 누군가에게 납치 당해 살해 당한 것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 소녀는 법이 심판하지 못한 죄인을 반드시 찾아내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정진수는 이런 소녀를 부추겨서 결국 살인을 하게한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을 내가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을 평생 용서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으며 살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엄마가 바라는 건 내가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루라도 빨리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일테니까.
<사바하>는 선과 악은 정해져있지 않으며, 누구나 신이 될 수도 야차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주인공들이 정말 그들이 원하는 구원을 찾았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나도 모호하다. 확실한 건 깨닫든, 그렇지 못했든 그들은 자신이 무얼 행해야 할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신이 알려준 것은 아닐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명 모두에게 신은 없는 존재나 다름 없었으니까. 우리는 신의 존재와는 상관 없이 스스로 선함을 선택할 수 있다.
<지옥>에도 물론 이런 인간의 선한 동기를 믿는 사람이 나오긴 한다. 정진수에게 내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 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믿지 않나보네요?' 라는 대사를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진실을 알면서도 좋은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저런 말을 들은 정진수는 이상한 쪽으로 자율성을 발휘하며 결국 세상을 혼돈에 빠트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지옥>을 보며, 현실도 저렇다는데 안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실이 저럴 지라도 우리에겐 그걸 바꿀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걸 원하는 사람은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길상한 존자시여, 길상한 존자시여, 지극한 길상존 이시여. 원만·성취 하소서).
*천수경(千手經)의 첫째구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요한1서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