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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May 11. 2022

상처를 대하는 다른 시선

티빙 오리지널 <돼지의 왕>과 영화 <래빗홀>

※ 이 글은 <돼지의 왕>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신 분 중 <돼지의 왕> 드라마를 보실 분이 계시다면, 해당 드라마는 학교 폭력에 대한 잔인한 묘사가 많아 직, 간접적인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시청에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당해본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속시원하게 그 상대를 두들겨 팬다거나 총으로 팡 쏴 죽인다거나 하는 상상을 해봄직하다. 농담으로 이런 얘기 한번쯤은 나눠보았거나 들어본적이 있을것이다. '저 사람 데스노트에 적을거야', '저 인간 필리핀 보내버려. 필리핀 청부살인 1명에 100달러' 폭력으로 되갚는 복수는 참 짜릿하지만 그걸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아무리 나를 악랄하게 괴롭힌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복수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는 법의 힘을 빌리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법은 우리편이 아니다. 법은 절대 약자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커녕,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법도 처벌하지 않는 그런 경우 대게 가해자들은 뻔뻔하게 잘만 산다. 나에게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큰 상처이자 벗을 수 없는 멍에인데 말이다. 내가 겪은 고통의 반만이라도 네가 겪었다면. 내가 겪은 것과 똑같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용서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런 나쁜 놈들을 내가 왜 용서해야 하는데? 왜 이해해야 하는데? 분노만 남는 것이 당연하다.

 

그림설명: 돼지 얼굴을 하고 후드티를 입은 사람이 검은색 배경의 벽 앞에 서 있다. 


티빙 오리지널 <돼지의 왕>에서는 폭력에 짖이겨진 어린 소년 3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부모에 의해, 학교 폭력에 의해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소년들. 제대로 된 보호와 치유를 받지 못한 소년들은 커서도 계속해서 그때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못해 내린 선택은 매우 극단적이다. 스스로 폭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민, 그리고 그런 경민을 저지하려고 하지만 죄책감과 상처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종석, 작게나마 희망을 갖고 살아보려는 데 번번이 실패하는 철. 너무 큰 고통과 상처 앞에서 세 소년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황하기만 한다.


그림 설명 :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점퍼를 입은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민은 어떤 사진을 보고 애써 잊고 있었던 상처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직접 복수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경민의 배우자는 그것을 미리 알고 동반 자살로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지만 경민은 살아남고, 배우자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경민이 복수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지렛대의 역할을 한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시절, 자신들을 구해줬던 영웅인 철이. 그리고 그런 철이를 죽게 만든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경민을 괴롭힌다. 경민은 철이의 환영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한 가해자들을 한명한명 죽이기 시작한다.


경찰서로 보이는 곳에 회색 티셔츠에 까만 옷 점퍼를 입은 남자가 칠판 앞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종석은 형사가 되어, 애써 상처를 잊은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연히 살인 사건 현장에 남겨진 자신의 이름을 본다. 그리고 범인이 같이 폭력을 당했던 경민이란 것을 알고, 어린시절 겪었던 학교 폭력의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자신이 죽게만든 친구 철이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수사에서도 우수한 실적을 내던 종석은 그 상처를 마주한 순간부터 좌절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변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철은 자신들은 돼지, 그리고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 무리는 개라고 칭하며 자신들과 같은 돼지는 절대로 개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철이는 오래전부터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방치 당했다. 어떻게 알게 된건지는 잘 나오지 않지만 철이는 싸움을 잘한다. 그로 인해 반에서 주도적으로 경민과 종석을 괴롭히던 강민과 일당에게 크게 되갚음을 해주게 된다. 드라마의 제목인 '돼지의 왕'은 싸움을 잘해서 자신이 개라고 지칭하던 가해자들을 꺾고 '돼지'들의 '왕'이 된 철이를 지칭하는 것인데, '돼지의 왕'이었던 철은 가정 환경이 학교에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로 전락해 버린다. 철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학교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자신의 죽음)을 선사하며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트라우마가 있는 피해자들은 경민과 종석 혹은 철이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할 수 없다. 가령 가정 폭력의 경우, 많은 피해자들이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하고 있음에도 쉽사리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그런 현실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https://theconversation.com/why-victims-of-domestic-abuse-dont-leave-four-experts-explain-176212). 링크의 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가해자를 더욱더 사랑한다면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 두려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가해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분노한 가해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피해자를 가장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해자가 다르다고 해도 많은 폭력들의 양상이 이와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돼지의 왕>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있다. 실제 세상의 경민, 종석, 철은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고, 행동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돼지의 > 폭력을 전시하는데 너무나 적극적이다. 드라마에는 아이들이 겪었던 폭력의 상황들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생생하게 재현된다. 현장에 심리 상담을 전담하는 인력이 있어서 폭력적인 장면을 촬영한  배우들에게 심리적인 보살핌을 제공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보살핌이 제공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는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가해자들은 사적인 복수로 짧게 최후를 맞고, 오히려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바람에  고통을 받고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종석이가 잘못된 선택을   맞지만, 종석이 또한 폭력을 당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없는 상황이었는데, 가해자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비해 종석이나 경민이는 너무  세월을 고통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걸 통해 감독은  말하고 싶은 걸까. 어떤 대안도 없이 폭력만이 나열되고 결국 폭력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돼지는 개가   없다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비관만 양산할 뿐이다.


연상호 감독의 원작 애니메이션을 각색하면서 작가는 "돼지의 왕을 보는 분들께서 세상은 왜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 있고 그들은 왜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지, 그 폭력의 근원은 어디서 왔는지 함께 사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왜 세상은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져 있냐고? 강자들이 약자들을 착취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자는 강자에게 폭력은 커녕 제대로 된 저항도 하기 힘들다. 서로 폭력을 휘두르기는 커녕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게 현실인데, 작가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왜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폭력을 전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답도 없는 폭력에 서로를 가두기만 한 채로 끝이 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종석은 철이를 죽게 만들었고, 경민이 역시 그걸 알면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큰 잘못을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복수의 끝에, 피해자인 약자들에게 너도 똑같다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드라마는 피해자였던 두 사람이 서로를 쫓다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 <래빗 홀>은 <돼지의 왕>과는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하게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인 베카와 호위가 그들이다. 베카와 호위는 4살 배기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운전이 미숙한 10대가 몰던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누구보다 소중했던 아들의 죽음을 두 인물이 어떤식으로 '받아들이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받아들인다에 굳이 따옴표를 붙힌 이유는, 한번 어떤 강한 폭력이나 사고에 노출된 이상 우리는 평생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돼지의 왕>에서 종석과 경민에게 나타나던 철이의 환상처럼 말이다.



베카와 하위는 8개월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둘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은 그 사고가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살아가 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하위는 죽은 아들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슬픔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그리고 큰 변화를 통해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의 물건에 집착하고, 아이의 동영상을 밤마다 보며 운다. 베카는 그런 하위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 역시 슬픔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건을 치우고 집을 파는 것은 슬픔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임시 방편일 뿐이다.


베카는 그러다 우연히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고등학생 데니스가 탄 스쿨 버스를 마주친다. 그리고 그와 마주치면서 우연히 대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진심으로 사과하는 데니스와 이야기를 나눌 수록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을 느낀다. 죽은 오빠 이야기를 꺼내며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하는 엄마에게 잔뜩 쏘아 붙이고, 아이와 함께 있는 엄마만 봐도 신경을 곤두 세우던 베카는 점점 엄마에게도 마음을 열고,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간다.



데니스 역시 아이를 죽게 만든 죄책감을 갖고 살아간다. 베카에게 끊임없이 사과하고, 자신이 실수로 과속을 한 것 같다고 갑자기 고백할 정도로 그 날에 대해 곱씹고 있다. 하지만 데니스의 시간은 베카, 하위와 달리 멈춰있지 않다. 그 사실을 깨달은 베카는 하염없이 통곡 하면서 마침내 8개월 전에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도 이제 움직여야 할 때임을 알게 된다.



오빠를 잃고 시간이 흐른 뒤 그 슬픔이 조금 줄어들긴 했냐는 질문에 베카의 엄마는 슬픔의 벽돌을 그저 주머니에 넣고 살아가는 것 뿐이라고 대답한다. 상처, 고통, 트라우마 모두 절대 덜어내려고 해도 덜어지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정말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너무 거대해서 형태도 짐작할 수 없던 것에 대해 차츰 알아가게 된다. 무게와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정말 시간이 오래 지나면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없던 것처럼 느껴지도 한다. 하지만 언제고 그것은 어제일처럼 다시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 주머니 속에 벽돌을 넣은 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왜 약한 이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이야기로 고통을 주는 건지 모르겠다. 개인적인 복수같은 폭력의 대물림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 폭력 그 자체에서 멈춰버린 <돼지의 왕>은 그래서 배우들의 호연이 무색하게 끔찍하고 별로다.


 

베카와 하위는 마침내 자신들의 주머니 속 벽돌을 마주 하기로 한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우선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다. 꺼리던 이웃과 친구를 모두 초대해서 파티를 하고, 애써 피하던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웃고, 음식을 먹고, 그러면서 먼저 떠나간 아들을 그리워 한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마당에 남은 두 사람은 처음으로 괜찮은 척하지 않고 황폐하고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절망적인 결말은 결코 아니다. 두 사람은 이제 절대 피하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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