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홀로 있는 그대여.
음악가 : 언니네 이발관
음반명 : 홀로 있는 사람들
발매일 : 2017.06.01.
수록곡
1.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
2. 창밖엔 태양이 빛나고
3. 누구나 아는 비밀 (With 아이유)
4. 마음이란
5. 애도
6. 나쁜 꿈
7. 영원히 그립지 않을 시간
8. 홀로 있는 사람들
9. 혼자 추는 춤
어느 성인영화에서 가져왔다는 허무한 이름의 유래와는 달리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항상 미간에 힘을 준 채 고뇌에 잠겨 있었다. <비둘기는 하늘의 쥐>(1996)라는 기묘한 발상에서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2008)라는 형용모순에 이르기까지, 한 청년의 허세로 시작한 밴드는 어느새 삶의 아픔을 노래하는 중년이 되어갔다. 9년의 시간을 거쳐 세상에 나온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음반, <홀로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노랫말 속 주인공은 슬프고 또한 아파한다.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듯이.
첫인상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구나'였다.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바람처럼 이석원은 쉼 없이 노랫말을 내뱉는다. 악기가 순차적으로 중첩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부터 그의 고백은 시작된다.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행위는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화자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또한 '어째서 우린 달리면 달릴수록 슬픈 것일까'라는 음악가의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어서 타자가 된 화자의 노래는 외로움을 낳는다("창밖엔 태양이 빛나고"). 창밖으로 태양이 빛나지만 그가 있는 곳은 비 오는 '창 안쪽'의 세계다. 외부의 힘에 등 떠밀린 화자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무거운 걸음을 내디딘다. 그는 눈부신 창밖 세계를 희망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가르쳐주길 바랄 뿐이다. 어째서 나는 홀로 고통 속에 있는가. 고통의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하련만.
이어지는 두 곡은 화자의 의식이 과거로 향하는 순간이다. "누구나 아는 비밀"은 아이유의 목소리를 빌려 한 때 화자의 옆에 머무르던 '너'의 목소리를 재현한다. 함께 있음에도 두 사람이 그려내는 것은 행복에 젖은 시절이 아니다. '같은 상처 안고 우연히 마주'쳤다는 그들은 영원을 믿지 않는다. 함께 있는 바로 지금을 즐기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다. 하지만 이미 예견하고 있었듯이 안녕은 두 사람을 찾아온다. 부드러운 신시사이저와 영롱한 건반음 등 다채로운 악기로 수 놓인 "마음이란"이 역설적으로 화자의 슬픔을 배가시킨다. 이후 화자는 처연함을 담아낸 기타를 기점으로 현재로 돌아온다. 과거의 이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게 애도를 표하는가 하면("애도") 우연히 마주친 '너'에게 미움을 쏟아내기도 한다("나쁜 꿈").
음반은 화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온 힘을 다한다. 유감스러운 점은 그 과정이 너무나도 일방향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란 일방적인 자기주장이 아닌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소통이다. 자기 할 말을 다했다고 해서 말하는 이가 자기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충분한 휴지(休止)를 통해 듣는 이가 던져진 말들을 추스르고 정리하게 함으로써 듣는 행위는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화자는 괴로움을 감출 길이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또 말한다. 선율과 리듬이 아닌 언어를 통해 구성미를 부여하려 한 결과 밴드 구성의 풍성함이 살아나지 못했다. 여기에 개별곡의 재생 시간이 길다는 점까지 더해져 부정적 시너지를 강화시키고 말았다.
다행히도 화자의 깨달음을 노래하는 후반부로 진입하면서 이러한 약점은 완화된다. 슬픔에서 벗어나 자기애(自己愛)의 의지를 다지며 세상과 불협하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라고 위로를 건넨다("영원히 그립지 않을 시간"). "홀로 있는 사람들"의 신스팝 사운드, "혼자 추는 춤"의 댄서블한 리듬은 화자의 이러한 심적 변화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깨달음을 얻은 화자, '홀로 있는 사람'으로 명명된 그는 춤을 춘다. 외로움을 벗어던지고 여기 아닌 곳으로 향할 그 순간을 꿈꾸며. 그렇기에 못내 아쉽다. 화자에게, 언니네 이발관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우리는 진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홀로 있는 사람은 '함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