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딛고 높이 날아오를 순간을 위해
음악가 : Lorde(로드)
음반명 : Melodrama
발매일 : 2017.06.16.
수록곡
1. Green Light
2. Sober
3. Homemade Dynamite
4. The Louvre
5. Liability
6. Hard Feelings / Loveless
7. Sober Ⅱ (Melodrama)
8. Writer in the Dark
9. Supercut
10. Liability (Reprise)
11. Perfect Places
사랑, 사모(思慕), 친애(親愛), 연정(戀情), 연애(戀愛). 그것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만큼이나 사랑은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해왔다. 가슴 시린 사랑의 노래에서 티격태격하던 친구가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까지, 그 재현 양상 또한 다채롭기 그지없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숫자의 사랑 서사가 꾸준히 이야기된 까닭은 다름 아닌 보편성에 있다.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고 싶을 정도로 민망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취해보고픈 연분홍 꽃내음.
<Melodrama>는 사랑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결코 달콤하지 않다. 하우스 파티의 하룻밤에 빗대어 전개되는 이야기가 담아낸 것은 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도, 아픔을 이겨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원더우먼도 아니다. 갓 20대로 접어든 젊은 음악가는 지독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다. 지나간 사랑에 집착하는가 하면 상대를 지치게 만들었던 자신을 향해 자조 섞인 노랫말을 내뱉는다. 연인들이 외면하려 했던 사랑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가 이 40분에 담겨 있다.
전작 <Pure Heroine>을 기억하는 이라면 "Green Light"가 공개된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자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Tennis Court"와는 대조적으로 표정은 풍부하고 어조는 단호하다. 흑백 의상이 아닌 강렬한 핑크 드레스를 두른 몸짓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동성은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다. 노랫말과 맞물리는 순간 이는 오히려 화자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떠나버린 연인과의 과거를 털어내고 앞길에 초록빛이 들어오길 바라지만 실제로 곡을 지배하는 것은 화자를 가로막는 붉은빛의 이미지다. 초록빛을 갈망할수록 화자의 미련은 역설적으로 커져만 간다.
붉은빛에 가로막힌 화자의 의식은 황홀한 첫 만남의 기억으로 향한다. 두 번째 트랙 "Sober"에서 화자는 파티의 흥겨움에 취해 연인과 첫 만남을 갖는다. 둔탁한 베이스 리듬과 은은한 신스 사운드가 점차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를 대변한다. 그러던 와중 기계음을 타고 하나의 물음이 피어오른다. '이 취기가 내려앉은 후,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화자는 답을 구하는 대신 현재에 몸을 맡긴다("Homemade Dynamite"). 기다렸다는 듯 존재감을 뽐내는 신스 사운드가 풍부한 코러스와 부딪히면서 중독적인 훅을 빚어낸다. 그런가 하면 "The Louvre"에서는 가창이 아닌 발화에 가까운 목소리를 통해 사랑에 의해 한껏 고양된 상태를 이야기한다. 고귀함과 거리를 두려 했던 로드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루브르의 명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유감스럽게도 회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고막을 직접 건드리는 "Liability"의 피아노 선율은 화자가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관계 맺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지치게 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온다. 이어지는 "Hard Feelings"에서 화자는 함께 했던 기억을 더듬어간다. 사랑이 남긴 재를 한 줌, 두 줌 걷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것은 미운 감정뿐이다. "Loveless"는 이러한 원망이 응축된 지점이다. 급기야 그는 'Loveless generation(사랑 없는 세대)'라는 표현으로 사랑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나아가 지나간 사랑을 발판 삼아 비상하리라 다짐한다.**
취기가 깬 후 두 사람의 미래를 염려하던 화자의 마음은 "Sober Ⅱ (Melodrama)"에서 현실화된다. 화려한 파티가 막을 내리고 어둠이 방을 씻어 내린 지금, 모든 기억이 백일몽처럼 흩어진다. 화자는 오래도록 고통을 떨쳐내지 못한다. 목소리의 입체감이 인상적인 "Writer in the Dark"에서 자신의 길을 걸으리라 이야기하면서도 "Supercut"의 속도감 있는 리듬 너머로 아름다웠던 과거가 아른거린다. 불완전했던 사랑에 대한 성찰("Liability (Reprise)")을 지나, 괴로움을 덜어줄 완벽한 장소를 찾고자 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Perfect Place"). 취기가 가시고 영웅은 사라진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의 괴로움을 잊게 해줄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리멸렬한 이별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내일을 행한 희망도 아파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도 이곳엔 없다. 노랫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닌 '나'에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Melodrama>가 청자에게 진한 여운을 남기는 까닭 또한 그 자기중심성에 있다는 점이다.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받는 스타가 아닌 상처 입은 한 인간을 그림으로써 청자가 화자에게 먼저 다가갈 여지를 남긴다. 위로를 건네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위로를 받기 위한 음악인 셈이다. 그렇기에 이는 음악가 로드에게 있어 서곡(序曲)에 불과하다. 청자가 내민 손을 맞잡고 상처가 아무는 순간, 젊은 음악가는 더욱 높이 날아오를 것이다.
* 'We'll never be royals'라 외치던 "Royals"의 노랫말을 떠올려보자.
** 도입부의 짤막한 내레이션은 폴 사이먼의 대표작 중 하나인 <Graceland>와 관련된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80년대 중반, 폴 사이먼은 재결합한 파트너 아트 가펑클과 다시금 불화를 빚고 있었으며 아내였던 캐리 피셔와의 결혼 생활도 파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배달된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영감을 받아 아프리카행을 결정, 월드 뮤직으로의 확장을 이루어낸 걸작 <Graceland>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랑을 털어내려는 의지가 담긴 곡에 이러한 내레이션을 삽입했다는 것은 아픈 기억을 자양분으로 삼아 더욱 성장하겠다는 화자의 의지가 담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