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플래시라는 기술로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지만, 시대가 변해서 이 기술이 필요 없어지면 어떡하지?
70, 80년대엔 그 당시 경제의 주축이었던 미싱 공장, 즉 옷을 만드는 공장이 많이 생겼다. 젊은 여공들이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해 좁은 미싱 책상에 앉아서 천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며 밤낮으로 일하는 것이 흔한 풍경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 미싱 공장에 대한 추억이 있다. 비가 오면 엄마가 다니시던 공장의 셔틀버스 정류소에 우산을 들고 나가 엄마를 기다렸던 것과 재봉 기계의 큰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손에 붕대를 감고 집에 오셨던 엄마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솔아 푸른 솔아'나 ‘사계' 같은 노래들을 들을 때면 그 시절 여공들의 생활에 감정이 이입되곤 한다.
하루는 밤샘 작업을 하느라 늦은 시간에 사무실 책상을 무심코 보는데 70년대에 미싱사로 일하시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그 당시 여공 중의 한 명이었고 젊을 때 재봉기술로 뭔가를 만드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더 잘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일을 하셨다고 했다. 그때 엄마의 모습이 지금 서울의 좁은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에서 나오는 전자파를 마시며 밤낮으로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내 모습과 겹치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엄마의 재봉기술은 시대가 변하고 공장의 자동화와 중국의 값싼 생산력 등에 밀려 한국에선 이제 수요가 많이 없는 기술이 되었다. 그것을 나에게 적용해보니 나 역시 '지금은 플래시라는 기술로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지만, 시대가 변해서 이 기술이 필요 없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두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서 실천에 옮겼는데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플래시라는 특정 기술이 아닌 나만의 ‘내공’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엔 플래시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플래시를 사용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플래시를 열심히 공부해 뛰어난 ‘플래시 개발자’가 되기보단, 디자인, 모션, 화면전환, 그리고 유저 인터랙션 등이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초점을 개발언어에서 콘텐츠로 옮긴 것인데, 웹사이트의 디자인과 모션의 디테일을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사용자가 어떻게 편하게 웹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을지, 메뉴 클릭 시 나오는 모션은 어떤 게 제일 직관적인지 등을 더 연구했다. 거기엔 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술은 항상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한가지 기술에만 의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듯이 플래시라는 기술 또한 언젠간 대체될 것이니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나만의 ‘내공'을 가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쌓인 내 실력은 후에 플래시 시장이 죽고 HTML5가 대세가 되었을 때도 내가 뒤처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두 번째로는 ‘크게 보고 눈앞의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당장 눈앞의 연봉, 직급 등에 연연해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승진을 위해 윗사람에게 아부하는데 시간을 쓰지 말고, 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실력을 쌓고 싶었다. 즉, ‘이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연봉을 많이 받자’가 목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성장한 모습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선 좁은 시야로 눈앞의 작은 것을 가지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일에만 집중하자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평소 시계나 반지 같은 손을 움직이는데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는 하지 않고, 옷도 편하고 빨리 입을 수 있는 운동복을 즐겨 입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현재의 연봉, 직급 등에 연연해서 회사를 쉽게 옮기거나 하지 말자'는 생각을 만들어 주었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 혹은 내가 얼마나 성장하느냐가 중요하지 연봉을 몇백만 원 더 받으려고 회사를 옮기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내 직급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회사를 옮기게 되면 또다시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고 신뢰를 쌓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국에서 잦은 이직을 하지 않고 한 회사에서만 4년 동안 다닐 수 있었던 이유이다.
게다가 그 당시 나는 ‘인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한창 티비나 뉴스에 ‘누구누구의 미친 인맥' 같은 말이 유행하던 때였다. 당시의 나는 ‘인맥은 세상에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찾는 비겁한 방법’이며 ‘동등하지 않은 인맥은 민폐'라는 생각을 했고 이런 내 생각은 나 자신을 더욱 고립시켜 작업에만 몰두하게 하였다. 즉, 동호회나 세미나 같은 모임에 참석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인맥을 쌓는 것에 시간을 쓰는 대신 혼자 방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갈고 닦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나는 항상 ‘언젠간 꿈의 무대인 퍼스트본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꿈'으로 생각했지 막상 나에게 와 닿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영어라는 큰 언어의 장벽이 있었고 당시 IT업계에서 해외취업이 흔하지 않아서 관련 정보를 얻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아서였다.
그런 내가 본격적으로 해외취업을 준비한 계기는 한국에선 더는 성장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였다. 대부분 회사에선 열심히 일하던 작업자의 시절을 지나 경력이 쌓이고 연봉이 올라가면 관리직으로 이동한다. 그 사람이 갖춘 전문성과 내공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보단, 높은 연봉의 관리자 한 명이 저렴한 연봉의 신입 인력 여러 명을 관리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회사 측에선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정점인 ‘장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만큼 관리자로 승진하기보단 내 분야의 통달한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든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있는 미국의 뉴스를 접할 때면 저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해외취업을 결심하고 준비한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뭔가를 만드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였다.
70년대 미싱사였던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작업자로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좁은 우물이 아닌 큰 바다로 나가야 할 시기라고 느꼈다. 영어도 못하고 유학은커녕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나였지만 미래를 위해 용기를 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 연말 29살의 겨울, 그렇게 해외취업을 위한 첫걸음으로 새로운 포트폴리오 제작에 들어갔다.
인터렉티브 디벨로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