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엣지 협업 프로젝트 기록 1. 이민선 개인전
매서운 추위가 머무르던 지난겨울의 중턱, 반가운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시를 하고 싶다는 민선의 제안.
평소 그의 시선을 통해 무료한 일상의 생경한 발견을 해왔던 바, 마음 바뀔세라 지체 없이 티타임을 제안했고 민선의 캔버스 백에 숨겨져 있던 페인팅들은 올봄 ‘Oh, I’m not dead yet’이라는 이름을 달고 디엣지에서 개화했다.
작품의 첫인상은 식물의 흔적이 있던 테이블 위, 베란다에 자리한 화분의 마른 가지, 채소가게 선반 한 켠 따위가 떠올랐다. 익숙하지만 모를듯한 식물이기도 하며, 느슨하게 반복된 패턴의 형태적 유희들로 이뤄진 페인팅들은 오브제의 재현이 아닌 오랜 시간 민선에게 체화된 이미지 요소들이 시감각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었다.
마른 것. 꺾인 것. 희미한 것. 뒤틀린 것. 부서진 것. 늘어진 것.
생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지나 생명력이 임시로 제거되거나
결함 있는 부분을 봅니다. 결과물이 식물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재를 재현하는 작업은 아닙니다. 머릿속에 수집해 둔 요소들을
간단한 규칙으로 재배치하여 여분의 생명력을 드라마틱하게 회복시킵니다.
얕고 마른 선을 반복적으로 채워나가며 형태가 천천히 자라나는 것을 봅니다.
- 전시 서문 중
출산 시기와 겹쳐 전시 준비는 오롯이 민선의 몫이었는데 그의 노고와 철수 후 공간에서 사라질 전시의 감흥을 남기고자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기록한다.
초기 미팅 때 다양한 그림들을 보여줬잖아요. 그중에서 이번 시리즈를 첫 전시의 테마로 잡은 이유가 궁금해요. 이 작업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요.
저의 첫 페인팅 시리즈 작업물이어서 가장 먼저 세상에 내보내주고 싶었어요. 시점을 돌아보니 캔버스 같은 형식에 직접 페인팅을 시작한 건 2020년부터예요. 오랫동안 이미지 가까이에서 살아왔지만 페인팅 작업을 할 거라고는, 심지어 그것을 모아 전시를 한다는 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저는 직업이 디자이너인 사람이고 디자이너는 특정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도 어느 순간 저에게서 목적 없이 나오는 이미지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 재미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적합한 시점에 적절한 재료와 머릿속 형상이 맞아떨어졌고 한번 시작하니 바퀴가 스르륵 굴러가는 것처럼 계속하게 되었던 게 이렇게 모였어요.
‘목적 없는 행위’가 인상적이에요. 우리가 살면서 재미만을 위해 하는 일이 얼마나 있나요?! 순수한 유희의 과정일 것이라는 것이 듣는 저로 하여금 멋지고 부럽네요. 요즘은 무슨 재미있는 일들을 해요? 혹시 베이킹도 재미를 쫓는 결과물들 인가요?
아무래도 이미지로 발현하는 것이 늘 즐거워요.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마음에 닿는 재료가 있으면 이리저리 색을 조합해 보면서 섞여가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겁고 그 과정을 통해 그리고 싶은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요. 그림을 그릴 때 너무 정돈하거나 정제하려는 강박은 버리려고 해요.
베이킹은 저에게 입체 조형과도 같아요. 버터, 우유, 밀가루, 달걀과 같은 비슷한 재료를 가지고 조합을 어떻게 달리하느냐에 따라 케이크가 되기도 하고 쿠키나 파이가 되기도 하죠. 제가 아는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과거에는 넘쳐나는 메시지 홍수 속에서 나까지 발산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베이킹은 먹어 없앨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전시 타이틀이 인상적이에요. 제가 속으로 뱉고 있는 말 같기도 하고요.
‘Oh, I’m not dead yet’ 은 민선님께 무엇인가요?
이건 사실 친구의 말에 대한 대답에서 가지고 왔어요. 어느 날 튤립 한 다발을 사서 돌아왔는데 친구가 “You bought dead flowers.”라고 하는 거예요. 방금 사 온 생기 넘치고 싱싱한 꽃인데 죽은 꽃이라고 하니까 그 말을 곱씹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 꽃을 죽은 채로 두고 싶지 않아서 ‘oh! I’m not dead yet’이라는 대답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전시장 벽 끝에 붙어있는 수채화 작업입니다.)
그 수채화 그림은 전시되고 있는 대부분의 작업들보다 나중에 그린 것인데요, 그 시점에 지난 작업들을 되돌아보니 제가 관심 두고 그려 왔던 것들이 대체로 불완전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아직’의 것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전시 제목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은 오히려 선명한 생에 대한 인식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기 넘쳐 보여도 죽어있을 수 있고 말라비틀어져있어도 살아있을 수 있어요. 어쨌든 우린 모두 ‘아직’ 죽지 않았어요.
+ 작품 중에는 실제로 잘 풀리지 않다가 시간이 흐른 후 더해보고, 달리 보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것들이 많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업한 Oh, Im not dead Yet #2 역시 과거의 그림 위에 스프레이라는 물성이 새롭게 더해지면서 ‘즐거운 결과’가 되었다.
기존 드로잉을 판화 작업으로 더 전개했는데요, 드로잉과는 다른 재미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판화로 작업을 연장한 이유와 작업하면서 드로잉과의 차별되는 점들이 있었다면 어떤 것일까요?
판화는 전시를 묶어주는 역할의 작업들에 사용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작업들도 있어서 판화작업으로 그 감각을 다시 되살리고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마침 디엣지에서의 전시를 계획하던 시점에 판화공방을 다니고 있었어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던 것 같아요. 전시하는 페인팅 작업들이 안료의 질감이 두드러지지 않아 판화로 확장하기에도 좋았어요.
페인팅 작업을 할 때는 최종 결과물의 모습을 그다지 계획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형상으로 완료될지 저도 잘 모르고 작업해요. 판화는 반대로 페인팅에서 완성된 형태를 소스로 분리해서 색상도 변경하고, 유리병같이 다른 매체에도 올려보고, 각각의 캔버스의 페인팅들을 조합해 보는 과정들에 또 다른 생동감이 느껴져서 즐거웠어요.
포스터 디자인은 제 그림을 오랫동안 보아온 김세윤 디자이너가 작업을 해주었는데요, 그림들이 저희 집 거실에 중첩돼서 쌓여있던 모습을 포스터에 구현해 주었어요. 디자인된 이미지를 실크프린팅하는 과정 자체도 하나씩 판을 올려가며 쌓아나갔기 때문에 그 과정 자체가 그림들의 겹쳐짐을 시각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민선님은 ‘안에 있는 것을 무언가로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안에만 움츠려 있기에 민선님의 시각과 해석이 너무 멋지기도 하고요.
민선님께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또 어떤 작업들을 갈망하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그냥 뭔가를 계속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지금 하는 스튜디오 이름이 m3m인데 다양한 메이킹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지었어요. 작업을 한다는 건 제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에요. 누군가는 언어로, 춤으로, 노래로 세상과 자신을 표현한다면 저는 아마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겠죠.
저는 앞으로도 계속 제 시각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작업들을 다채롭게, 질리지 않고 꾸준히 하고 싶어요. 올해 안에 작업들을 모아서 또 한 번 전시를 할 수 있기를 바라요.
전시를 한다는 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제 내장 일부를 꺼내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숨을 데가 없으니 실제로 자꾸 움츠러들기도 했었고요. 디엣지에서 부드럽게 손잡아 주셔서 저도 용기 내어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차근차근 즐겁게 준비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민선은 이번 전시를 위해 쓰다 남은 광목천에 흐르고 늘어진 선들을 그려내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손님들은 들어갈 수 없는 화단 공간에 들어가니 유리 천장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묵직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 가운데 미세하게 흩날리는 드로잉들에 둘러 쌓인 순간이 참 좋았다.
작업과정 전반과 전시 타이틀에서도 보듯이 ‘우린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 무언가에 맞닥뜨려있다면 ‘아직’의 여지에 기대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진공관 같던 화단에서 나직하게 보듬던 광목의 그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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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ImNotDeadYet
2024. 3.23- 4.5
https://www.instagram.com/theedge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