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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Nov 12. 2021

계획하지 않고 살면 어떻게 될까?

삶과 행복에 관한 E와의 대화

 E는 14년 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다. 지금은 육아 휴직으로 오롯이 아빠로 지내며 휴식을 즐기고 있다. 그에게 휴직은 장기전에 대비한 에너지 충전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집안일도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도 보고, 때로는 하루 종일 잠을 자기도 하면서 충분히 쉬고 있다고 말했다. 쉬라 해도 잘 쉬지 못하고 자꾸 일을 버리는 나와는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E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실은 과학고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공부에 욕심도 있고, 승부욕도 강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 그런 게 아니었다. E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 친구 따라가게 된 과학고


나: 어릴 때 부모님이 너한테 공부해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안 하셨어?

E: 아버지는 그런 터치 전혀 없었어. 엄마는 약간 공부해야 되지 않냐 이런 얘기 한 번씩 하시기는 했지. 그런데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러면 그냥 거기서 끝나는 분위기였어.

나: 너는 중학교 때부터 원주로 나와 공부했잖아. 네가 의지가 있어서 그렇게 온 거였어?

E: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랬지. 그런데 공부하려고 간 게 아니고, 중학교 1학년 때 친했던 친구가 누나 따라 원주에 간다는 거야. 나도 누나가 원주로 나가니까 같이 나가자 그래서 나간 거지. 

나: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고, 꽤 어린 나이였는데 부모님이 그냥 보내 주신 거야?

E: 그렇지. 엄마는 가서 공부 열심히 할 거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셨어. 그런데 아빠가 처음에 반대를 했어. 그런데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하고 보내달라고 아빠한테 얘기해보라고 하셨지. 그래서 가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말했고, 아빠가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어. 

나: 와, 이건 진짜 반전이다. 나는 너희 부모님이 너 더 큰 곳에서 공부시키려고 보내신 줄 알았어. 

E: 아니야. 근데 나갔는데 할 게 없었어. 원주에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고, 할 게 없으니까 집에서 그냥 수학 문제집만 풀었어. 그때 그렇게 1년 공부한 게 엄청 컸지. 

나: 그걸 기반으로 과학고로 온 거야?

E: 나는 인생 결정 대부분이 친구 때문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 

나: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네가 중학교 때부터 공부에 욕심도 있고, 그래서 원주에 갔고, 과학고도 가고 그랬다고 생각했어. 

E: 나는 예외 케이스야. 대부분 애들이 전교에서 순위권 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에 대한 꿈이 큰 상태로 치열하게 학교에 들어오잖아. 그런데 나는 달랐어. 일단 책 읽는 것도 안 좋아했고, 국어, 영어 이런 과목이 워낙 싫었어. 그러던 와중에 중3 때 우연히 경시반에 들어갔는데, K랑 친해진 거지. K가 자기는 과학고 간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그럼 한번 가볼까?’ 그랬어.

나: K의 영향으로 네 인생이 바뀐 거야?

E: 운 좋게 갔어 그래서.

나: 공부 싫어했었으면, 경시대회 상 받아서 간 거야?

E: 그렇지. 나는 내신은 안 좋았지. 내신으로 가면 같이 들어오는 애들이랑 비교할 그게 안 됐지.

나: 그랬구나.

E: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도 충격이 덜했어. 나는 애들이 시험을 못 봤다고 울고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됐었어. 

나: 헉. 나 진짜 많이 울었는데.

E: 너도 울었어?

나: 그럼. 나는 중학교 때부터 시험 못 보면 맨날 울었어.

E: 너 중학교 때 맨날 1등 했잖아.

나: 그러니까 1등이랑 상관없어. 그냥 시험을 좀 못 본 것 같으면 막 울었어. 약간 완벽주의? 하나라도 틀리면 그게 너무 속상하고 그랬어.

E: 승부욕도 있고, 그랬었겠지. 나는 뭐 그렇지는 않았어.


 E와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학창 시절 작은 나만의 세상에 갇혀 지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에, 같은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며 살았지만, 다들 다른 생각을 하며 그 공간에 있었다. 고등학교 이후에 펼쳐진 E의 이야기도 반전이었다. 


#2. 계획하지 않고, 삶의 흐름을 따라


E: 나는 지금까지 거의 계획하지 않고 살았어.

나: 진짜?

E: 아까 말했잖아. 원주 간 것도 그냥 간 거고, 과학고 간 것도 그냥 간 거고, 대학교 간 것도 선생님이 그냥 수시 원서 주면서 써보라 그랬어. 그래서 그냥 냈지. 수시에 붙고 나니까 정시 원서 쓰는 게 귀찮아서 그냥 수시 붙은 데로 간 거야.  

나: 너는 삶의 흐름에 너의 몸을 맡긴 거 같은데?

E: 대학 다니다가도 군대 갈 계획이 없었어. 사실 그때는 석박사에 가서 카이스트에 간 친구들을 다시 만나겠다는 목표가 있기는 했지. 그런데 즉흥적으로 군대를 가게 됐어. 

나: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E: 군대 갔다 온 후에는 자퇴를 하고 싶었어. 그래서 부모님한테 자퇴하겠다고 얘기했거든. 나는 그냥 시골에서 공부방 차리고, 엄마 아빠 모시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얘기했지. 엄마는 처음에는 ‘얘가 왜 이러지?’ 그러다가 한참 들으시더니 학교 그만두고 내려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셨어. 

나: 어머님은 정말 너를 항상 지지해주셨구나. 

E: 응. 그런데 아빠가 반대를 하셨어. 대학 졸업하면 뭘 할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 그래서 못해도 S사는 간다고 했지. 그때 우리 대학에서 S사에 취업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거든. 아빠가 그러면 최소한 대기업 직장 생활을 몇 년이라도 좀 해보고 다시 얘기를 하자는 거야.

나: 그게 지금까지 온 거야?

E: 내가 그러면 그 회사에 합격해서 다시 오겠다 그랬지. 그게 여기까지 그냥 흘러온 거야.

나: 나는 너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네.

E: 우리 고등학교 친구들이 다 그렇잖아. 속내를 터놓고 이런 얘기할 일이 사실 없었지. 당시에는 이게 제일 민감한 문제였고. 

나: 맞아.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늘 계획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매일 하루 단위의 계획을 하며 산다.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계획하며 사는 삶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삶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계획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 가능하다.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 만족할 수 있는 낙천성이 E의 삶을 이끌어 온 게 아닐까. 


 E는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중간에 전공을 바꿨던 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했다. 갑자기 인터뷰어가 바뀌고, 나는 전공을 바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 “그냥 해 봐!”라고 얘기할 거야. 


E: 너는 전공 한 번 바꿨잖아. 왜 전공을 바꿨던 거야?

나: 나는 이 세상이 궁금했어. 그전까지 계속 공부만 하고 지내왔잖아. 내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기분이 들었어. 대부분 졸업하면 다 삼성, lg 연구소로 갔었잖아. 아는 회사가 그거뿐인 거야. 길이 너무 빤히 보이는 게 오히려 두렵게 느껴졌어. 분명히 세상은 넓고,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엄청 많은데, 나한테 보이는 길은 명확하지만 너무 좁게 느껴졌어. 그런데 경영학은 세상에 대해서 두루두루 볼 수 있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경영대학원을 선택했지.

E: 석사 갈 때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학사 때는 그냥 별생각 없이 꾸준히 한 거고? 

나: 대학교 4학년 때 쉬면서 미래에 뭘 할지 생각해 보고 싶었어. 그때 엄마한테 나 휴학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그랬거든. 너무 힘들다고. 공부만 계속했으니까 쉬면서 이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좀 찾고 싶었거든. 근데 집에서 조금만 더 참으래. 조금만 더 참으면 졸업이라고.

E: 너는 어머니가 그렇게 얘기하셨구나. 

나: 부모님 입장도 이해가 돼. 그런데 나는 그때 너무 답답했어. 

E: 만약 네 애들이 그런 식의 반응이 나오면, 너는 어떤 대답을 해줄 거야?

나: 나는 “그냥 해 봐!”라고 얘기할 거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그때는 뭔가 빨리 성취를 해야 되고, 직업적으로도 안정을 이뤄야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돌이켜보면 20대 초면 어린 나이잖아. 뭐든지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나이. 1년 쉬어볼 수도 있는 거고. 1년 쉬면서 알바를 해볼 수도 있고, 뭔가 부딪혀 보면서 이것저것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그런 것 없이 그냥 흘러간 것들이 좀 아쉬워. 


 아쉬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보통은 해 본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다. 어떤 길이 더 나은 선택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길을 다 선택할 수도 없다. 그래도 조금 더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해보고 싶은 것들은 해보며 살면 좋겠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그 누군가의 도전을 격려하고 응원하며 살면 좋겠다. 삶의 길은 다양하니까. 


#4. ‘주도적인 삶’에 관하여


나: 어릴 때 생각한 것과 지금 삶 중에 가장 다른 걸 물었는데, 네가 ‘주도적인 삶’이라고 보내줬잖아. 이 대답을 보면서 너무 공감이 됐어. 보통 그러듯이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받고, 회사에 들어가고 이렇게 살면 주도적인 삶 자체가 힘든 것 같아.

E: 맞아. 그래서 나는 회사 다니는 중간에 연차 7~8년 정도 됐을 때 친구들한테 나가서 장사하자는 얘기를 많이 했었어.

나: 무슨 장사?

E: 아무거나. 나는 일단 초반에 받았던 월급이 만족스럽지 않았어. 그리고 내 삶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 그래서 나가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무한대로 벌고 싶다고 생각했어. 혼자 하기에는 겁도 나고 그래서 친구들하고 같이 해보거나, 매형 하는 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거든. 그런데 이것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이었고, 회사일을 계속하다 보니 그런 생각들이 없어졌어. 

나: 계속 다니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저절로 없어졌구나. 

E: 응. 일하다 보니 월급도 오르고, 일도 적응되니까 스트레스도 덜 받고. 애들도 크니까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내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어. 그래서 목공도 배우러 다니고 있지. 취미 생활할 시간도 생기고, 삶도 조금씩 만족스럽게 되니까 옛날에 들었던 생각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아.

나: 지금 삶이 좋은 거네. 근데 너 얘기 들어보면 자유롭게 사는 삶을 강하게 원하는 게 느껴졌거든? 혹시 사업을 하거나, 돈을 버는 것과 관련된 공부를 해 본 적은 있어? 책을 읽거나.

E: 나는 책을 잘 안 봐. 살면서 읽은 책이 몇 안 돼.

나: 네가 K랑 친해서 너도 책 많이 읽는 줄 알고 있었어.ㅎㅎ 내가 올해부터 부와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지난주에 읽은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책의 내용이 너무 마음에 와닿았어. 그거 얘기해볼게. 

 책 내용 중에 고학력일수록 자유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나와. 책을 읽을수록 사회 시스템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 돈 있는 사람들이 똑똑한 사람들을 키워서 틀에 가둬 놓는 시스템처럼 느껴졌거든. 자유롭게 살려면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하는 거야. 

E: 그래.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공부해서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버리는 것, 어떻게 보면 손절하는 게 아깝잖아.

나: 맞아. 아깝지. 나도 물론 지금 무언가를 이룬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기는 한데, 경제나 부에 대한 공부는 꼭 해야 하는 것 같아. 결국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은 나의 사고와 행동에 따른 거잖아. 그런데 책을 읽으면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편견들이 깨져. 그리고 내가 좀 다른 행동을 할 여지가 생기고. 또 돈과 시간이 여유로운 삶을 살면 좋잖아. 보통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현실에 일반들이 생각하는 관념을 깨고, 실질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나도 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 

E: 난 쉬면서 계속 추리 소설만 읽고 그랬거든. 네가 읽었던 것 중에 괜찮은 거 추천해줘 봐.

나: 너는 컴퓨터 전공했고, 네 시간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하니까 ‘부의 추월차선’이랑 ‘나는 4시간만 일한다’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육아, 좋아하는 일, 사는 이야기 등등 몇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다가와 통화를 마쳤다. E는 바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시간을 만들고, 여유와 지나치기 쉬운 행복을 지켜가고 있었다. 인생은 마라톤, 장기전인 것처럼 살아가는 E의 삶의 태도를 본받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었던 생각. 우리의 자유 의지를 지키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최소한 일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을 돌보면서, 삶의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고 살면 좋겠다.


(CoverImage by Luca Brav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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