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잉여공작소 Jan 25. 2017

기록에 대하여

캠코더 그리고 글

2017.01.23.





3~5살쯤 됐을 때다. 우리 집에는 SONY에서 나온 캠코더가 있었다. 엄마가 산 물건이었다. 제 뱃속으로부터 나온 어린것들의 재롱을 간직하려 엄마는 공원에서, 놀이동산에서, 거실에서, 침대에서, 부엌에서, 동생과 나를 캠코더 렌즈에 참 열심히도 담았다. 덕분에 지금도 TV 속의 어렸을 적 우리를 보며 엄마는 이따금씩 깔깔댄다. 엄마에게 캠코더는 소중했다. 캠코더에 담긴 영상은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그날의 육아 일기이자 먼 훗날 다시 꺼내볼 기억, 기록이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내가 글을 쓰는 까닭도 엄마가 캠코더를 산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글을 통해 오늘을 기록하고, 엄마는 SONY 캠코더를 통해 그 시절을 기록했다. 요즘 인스타그램이 인기를 얻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기록함으로써 세계와 관계 맺기를 원한다. 인류에게 기록에 대한 열망이란 밥 먹고, 똥 싸고, 퍼 자고, 숨 쉬는 것과 같은 '생리적' 욕구인 셈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숱한 사진들은 먼 옛날 마로스 동굴에 찍혔던 누군가의 손과 꽤 비슷하다.


"내가 여기에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마로스 동굴에 남아있는 핸드프린팅의 존재 목적과 맞닿아있다. "여기, 내가 있었다!"고 외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외침은 책에 대한, 영화에 대한, 사람에 대한, 생각과 느낌에 대한, 즉 오늘 겪은 모든 것에 대한 기록으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 굳이 글이어야 했는가. 그림으로는 기록할 수 없었을까? 춤과 노래로는?


나는 글쓰기가 무질서를 질서로, 가능성을 실재(實在)로, 모호함을 완연함으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동시에 내 자아의 외연이 확장돼 다른 자아와 만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는 글을 쓰며 머리 속에 부유하던 갖가지 사유의 편린들이 적확한 언어로 정확히 포착됐을 때, 더없이 짜릿하고 황홀한 기분을 느낀 이유이기도 했다. 그 찰나, 뒤통수에서 출발한 한 줄기의 무언가가 정수리를 지나 이마로까지 빠르게 확-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이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른 무엇도 아닌 '글'로 오늘을 기록하고 싶단 마음이 든 것은.


그럼에도 글쓰기는 조금 버겁다. 사실 나는 글쓰기에 매번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쓸 생각이 없을 때도 있고, 글 쓰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모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글 때문에 피로해질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탁월한 글을 보며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심 질투하고 부러워할 때는 더더 많고……. 그래서 내 부족과 결핍에 몸부림칠 때는 더더더 많다. 수없이.


하지만 이런 모든 불편과 자괴감을 차치하더라도, 글로써 기록을 남기는 걸 포기하진 않을 터다. 생리적인 욕구로서의 기록에 대한 열망과 글을 쓰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짜릿함을 짐짓 모른 체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물론 꾸준하면서까지 글을 쓸 순 없을 듯하다. 그것은 글로 밥벌이하는 (존경해 마지않는) 분들이나 가능한, 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행이다.


종종 엄마는 우리 집에 놀러 온 옛 친구나 친척에게 캠코더 영상을 TV로 연결해 보여주곤 하신다. 그때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엄마의 캠코더처럼, 나도 먼 훗날 오늘 기록한 글을 보면서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지금 행복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마음과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엄마가 친구들과 옛 캠코더 영상을 보며 깔깔대듯, 나도 동료들과 여기에 곧 쌓일 글을 읽으며 깔깔댈 그날을 떠올려본다. 그리하여 모지랑이가 되도록 맘껏 기록해보자, 다짐해 본다.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