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웨일즈의 수도인 카디프 (Cardiff)라는 도시에서 5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다. 영국의 수도는 런던인데, 무슨 또 다른 수도가 있다는 건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사실 영국이라는 나라의 공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북 아일랜드의 연합왕국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4개 나라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각 국가마다 독자적인 국기가 있고, 독립적인 의회가 존재하며, 별도의 수도도 존재한다. 영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나라, 비록 영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웨일즈와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해 볼까 한다.
“Croeso i Cymru”
잉글랜드에서 웨일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어와 함께 병기해 놓은 웨일즈어 표지판이다. 웨일즈는 경상북도 크기의 작은 나라지만 고대 켈트어에 뿌리를 둔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공적인 문서나 표지판 등에는 웨일즈어가 영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수도 카디프는 외지인들의 유입이 많은 도시라서 영어가 주 언어지만, 중부나 북부 웨일즈에는 웨일즈어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마을도 존재한다. 그러나 웨일즈어도 한 때 큰 위기가 있었는데, 영국 정부가 웨일즈에 공교육을 도입하는 조건으로 영어로 된 수업만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지속적인 캠페인을 통해 이제는 공교육 과정 중의 하나로 웨일즈어가 교육되고 있고, 웨일즈어가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위에 써 놓은 웨일즈어는 우리말로 “웨일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이다. 웨일즈 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큼뤼(Cymru)라고 부르며, 이는 ‘동포’ 또는 ‘동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웨일즈 (Wales)라는 이름은 잉글랜드 인들에 의해 붙여진 말로 ‘이방인’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브리튼 섬의 원주민은 웨일즈 인들의 조상인 켈트족이었고, 오히려 잉글랜드 인들의 조상인 앵글로 색슨족이 이방인이다. 다뉴브 강변에서 이주한 켈트족은 기원전 10세기부터 브리튼 섬의 주인이었다. 스톤헨지 (Stonehenge) 등으로 잘 알려진 드루이드교 (Druid) 문화도 이 시기에 융성했었다. 로마의 침략 초기 용맹하게 대항하던 켈트족은 어느덧 로마의 군사력에 밀려 브리튼 섬의 서쪽 끝 (웨일즈), 북쪽 끝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바다 건너 (아일랜드)로 쫓겨나게 되었다. 로마 패망 후 권력의 공백이 생긴 잉글랜드 지역에 유입된 앵글로 색슨족은 말 그대로 이방인 침략자였다. 야만적이고 전투적인 이방인의 공격에 원주민 켈트족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여 브리튼 섬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다가 8세기에 잉글랜드와 웨일즈 국경에는 오파의 제방 (Offa’s Dyke)이라는 높이 2.4m, 길이 300km의 거대한 해자가 들어서게 되고, 이후 잉글랜드 인들은 그 국경 너머의 사람들을 오히려 이방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64년째 즉위 중인 엘리자베스 2세를 잇게 될 찰스 왕세자의 공식 명칭은 ‘웨일즈의 왕자 (Prince of Wales)’이다. 국민통합을 위해 웨일즈라는 이름을 붙였나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명칭에는 웨일즈의 굴욕적인 역사가 담겨 있다. 역사 이래로 웨일즈 전역을 아우르는 지도자는 브리튼인들의 왕 (King of the Britons)이라고 불렸는데, 전설 속의 아더 왕도 영국의 국왕이 아니라 야만적인 앵글로 색슨족과 맞서 싸우던 브리튼 인들의 왕이었다. 시간이 흘러 웨일즈 전역을 아우르는 지도자에게는 ‘웨일즈의 왕자’라는 칭호가 붙게 되는데, 영어로 번역된 것이 왕자 (Prince)이지 웨일즈어로는 지도자 (Tywysog)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3세기 말부터 잉글랜드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던 웨일즈는 마지막 웨일즈의 왕자까지 전투에서 잃게 된다. 이후 웨일즈의 왕자라는 명칭으로 잉글랜드에 반기를 든 웨일즈의 지도자가 몇몇 있었으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진압이 되었다.
웨일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1301년에 웨일즈의 왕자라는 칭호를 자신의 후계자에게 부여했다. 당시 웨일즈인들은 웨일즈에서 태어나고 영어를 말하지 않는 사람만을 지도자로 인정했는데, 에드워드 왕자는 전쟁 도중 북웨일즈의 카나번 (Carnarfon) 성에서 태어났고 왕실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후 웨일즈의 왕자는 영국 왕실의 후계자에게 내리는 명칭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찰스 왕세자도 웨일즈의 왕자가 그의 공식 명칭 중 하나이다. 찰스 왕세자의 책봉식은 최초로 텔레비전 중계가 된 책봉식이기도 했는데 전통에 따라 카나번 성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웨일즈인들 중에는 이를 반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크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 잭은 파란색 바탕에 하얀색과 빨간색의 십자가 문양이 들어가 있다. 유니언 잭은 영국을 이루고 있는 국가들의 국기를 합쳐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사선 십자가는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류 국기, 빨간색의 십자가는 잉글랜드의 성 조지 국기, 빨간색의 사선 십자가는 북아일랜드의 성 패트릭 국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흰색과 초록색 바탕에 웨일즈의 상징인 빨간 용이 그려져 있는 웨일즈 국기는 유니언 잭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처음 유니언 잭이 사용된 때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위까지 차지하게 된 17세기 초반 제임스 6세 시절인데, 웨일즈는 이미 16세기에 잉글랜드에 완전 합병이 된 바람에 새로운 국기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웨일즈의 현재 국기는 19세기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해서 1950년대에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니 17세기 당시에는 웨일즈를 반영할만한 국기가 없었다고도 할 수도 있겠다.
특이하게도 웨일즈는 영국의 다른 세 나라와는 달리 수호성인의 깃발을 국기로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이다. 웨일즈의 수호성인은 세인트 데이비드로,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사용한다. 웨일즈 뿐 아니라 웨일즈와 같은 뿌리인 잉글랜드의 콘월 지방과 프랑스의 브리타뉴 지방에서도 심심치 않게 성 데이비드의 깃발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웨일즈의 국기는 웨일즈의 국화인 수선화 또는 파를 상징하는 흰색과 초록색 바탕에 잉글랜드의 흰색 용과 맞서 싸우는 빨간 용이 중앙에 있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웨일즈를 상징하는 어떠한 내용도 유니언 잭에는 반영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웨일즈인들이 유니언 잭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도 큰 유행인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의 모태로 영국의 “브리튼스 갓 탤런트 (Britain’sGot Talent)”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다양한 특기가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재주를 뽐내고 심사위원과 시청자들이 최후의 우승자를 가리는 형식이다. 이러한 오디션 이전에도 콩쿠르나 음악제 등 다양한 경연대회가 있어왔지만, 웨일즈에서는 무려 1000년 전부터 토너먼트 형식으로 시와 음악 경연을 벌여 왔다. 현재도 매년 진행되고 있는 이스테드보드(Eisteddfod)가 바로 그것인데, 그 기원은 무려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웨일즈 서부의 바이킹 족을 물리치고 거대한 카디건 성을 증축한 리스 공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대한 예술축제를 기획했다. 공고 기간만 1년에 달했던 이 축제는 시 부문과 음악 부문으로 나누어 2명의 우승자를 가려내는 경연 형식이었다. 1176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열린 이스테드보드는 웨일즈 뿐 아니라 멀리 아일랜드와 프랑스에서도 참가자가 올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후 비정기적으로 이어져 오던 이스테드보드는 19세기 들어 웨일즈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1858년 클란고클렌 (Llangollen)과 1860년 덴비 (Denbigh)에서 펼쳐진 경연은 이스테드보드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이스테드보드는 발전을 거듭하여 매년 여름 열리는 국가적인 축제로 거듭났다. 웨일즈어로만 진행되는 내셔널 이스테드보드는 매년 전 세계에서 온 6000명 이상의 참가자와 15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운집하는 문화 축제의 장이다. 이와 함께 클란고클렌에서는 1947년부터 국제 이스테드포드라는 세계 민속문화축제를 진행하고 있고, 청소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한 청년 이스테드포드도 매년 개최되고 있다. 웨일즈의 여름은 그야말로 수준 높은 문화를 겨루는 대국민 오디션의 기간인 셈이다.
21세기에 세계 최대의 항만을 얘기할 때는 거대한 시장과 산업단지가 배후에 존재하는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 부산 등 대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는 거대한 산업단지도 항만도 존재하지 않는 소규모 항구도시이다. 그러나 120년 전만 해도 카디프는 수 없이 많은 배가 출입하는 세계 최대의 항만이었다. 웨일즈에는 19세기 초반부터 산업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특히나 남부 웨일즈 산지 계곡에서는 석탄과 철광석 광산을 바탕으로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 교통수단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증기기관차와 증기선이 발명이 되면서 석탄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일정한 수준으로 지속적인 열을 낼 수 있는 양질의 석탄이 필요했는데, 그 조건에 부합하는 석탄이 바로 남부 웨일즈의 석탄이었다. 광산에서 채굴된 석탄은 운하나 기차를 통하여 카디프 항구로 이동하고, 다시 증기선에 연료나 화물로 실려서 수출이 되었다. 20세기 초반 카디프는 연간 1000만 톤이 넘는 석탄을 수출하는 세계 최대 항만으로 이름을 올렸고, 카디프의 석탄 거래소는 세계 석탄 가격을 결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까지 승승장구하던 웨일즈의 석탄산업은 전후의 수요 급감과 가격경쟁력 약화 등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는다. 더불어 석탄 외에는 물동량이 없었던 카디프 항도 서서히 버려지고 잊힌 항만이 되었다. 20세기 말 카디프 항만 재개발이 시작되어 기존 카디프 항의 상당 부분은 주거지역으로 재개발되었고, 바다와 인접한 공간은 거대한 담수호가 있는 레저공간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카디프 베이의 모습을 보면 한 때 세계 최대 항만이었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한 때 세계 최대 항만이었다는 자부심은 아직도 카디프에 남아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몸 값 비싼 축구선수 중 하나인 가레스 베일(Gareth Bale), 맨유의 전설이자 플레잉 코치였던 라이언 긱스 (Ryan Giggs) 등은 웨일즈가 낳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몇몇 선수들의 등장에도 웨일즈의 축구는 유럽예선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여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펼쳐진 유로 2016에서의 4강 진출은 ‘기적’으로 일컬어질 정도니 말이다. 웨일즈가 유난히 축구에 약한 이유는 인구가 적은 탓도 있겠지만 축구가 상대적으로 인기 있는 종목이 아닌 탓도 있다. 웨일즈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포츠는 럭비로, 특별히 럭비 국가대항전은 그 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웨일즈 축구 대표팀이 경기를 하는 카디프 시티 경기장이 27,000석 규모인데 반해, 웨일즈 럭비 대표팀이 경기를 하는 카디프 밀레니엄 경기장이 74,500석에 개폐형 지붕까지 갖추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차이인지 실감할 수 있다. 또한 밀레니엄 경기장 앞에는 럭비 국가대표팀 관련 상품만을 판매하는 상점이 자리 잡고 있고, 경기 당일에는 카디프 시내의 교통이 전면 통제될 정도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비록 현대 럭비는 1850년대에 유입되었지만 웨일즈에서는 중세시대부터 크나판(Cnapan)이라는 현대 럭비와 유사한 스포츠를 즐겨왔으며 지금도 럭비는 웨일즈 문화를 대변하는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다. 2012년 6개국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달성할 때, 그리고 2013년 대회에서 마지막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꺾고 역전 우승을 할 때 카디프는 거리로 뛰쳐나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웨일즈인들로 축제 분위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숙적 잉글랜드를 꺾을 수 있는 스포츠가 축구보다는 럭비이다 보니 웨일즈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럭비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전 세계 여행 가이드북을 출간하는 론니 플래닛(Lonely Planet)에서는 2012년에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로 웨일스를 선택하였다. 이유는 2012년 5월 웨일스의 해안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웨일스 해안길(Wales Coast Path)이 완성되었고, 이로써 웨일즈는 세계 최초로 국경을 걸어서 일주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웨일즈의 남쪽, 서쪽, 북쪽을 지나는 1,450km의 웨일즈 해안길에 동쪽을 지나는 280km의 오파의 제방길(Offa’s Dyke Path)을 걸을 경우 웨일즈를 완벽하게 한 바퀴 도는 셈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걷기 여행이 유행이 되면서 제주도의 올레길, 지리산의 둘레길, 그리고 각 지방의 명소마다 걷고 싶은 길이 완성되었지만 영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걷기 여행이 시작되면서 각 지역마다 도보 여행길이 등장하였다. 그 결과 웨일즈 해안길의 일부인 펨브로크셔 해안길이나 오파의 제방길 같이 수 백 km에 달하는 장거리 도보 여행길도 1970년대부터 완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사유지라도 농장, 목초지, 임야 등에는 공용 도보길(Public Footpath)을 제공해야 한다는 법이 발효되고 나서는 볼거리 많은 다양한 도보 여행길이 속속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존에 지자체에서 만든 해안길과 새롭게 조성한 1,450km의 길을 연결한 웨일즈 해안길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도보 여행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웨일즈 일주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웨일즈 해안길은 8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구역마다 특색이 있으니 시간이 부족하다면 한 구간만을 정해서 완주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웨일즈의 해외 직접투자 유치를 전담하는 웨일즈 개발청(Wales Development Agency)의 첫 번째 외자유치는 1996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자유치의 대상은 한국의 LG반도체로, 첨단기술 산업인 전자산업을 클러스터화 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으려 했던 웨일즈에선 LG 반도체 유치가 큰 뉴스거리였다. 무려 3.5조 원의 투자와 6천 개의 일자리를 약속한 LG 반도체에 웨일즈 개발청도 2천억 원에 달하는 지원을 약속했다. 카디프에 이웃한 뉴포트라는 도시에 거대한 공장부지가 개발이 되고 한국에서 전문 인력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남부 웨일즈의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찾아오고 재계의 대규모 빅딜이 이루어지면서 LG반도체는 현대 하이닉스에 인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웨일즈에 들어온 LG 전자는 고작 백색가전과 LCD 모니터를 생산하는 부문뿐이었고, 절정기에도 2천 명의 인력밖에 채용을 하지 못했다. 2004년에 공장 두 개의 문을 닫으면서 채용 수준은 400명 수준까지 떨어졌고, 결국 2006년 LG전자가 폴란드로 완전히 이전하면서 웨일즈 개발청이 꿈꿔왔던 첨단기술 산업단지의 꿈도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도 웨일즈에서는 해외자본 유치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LG반도체 유치를 꼽고 있다. 카디프에서 한국에 대한 얘기를 하면 북한 다음으로 많이 듣게 되는 얘기가 LG 반도체에 대한 얘기일 정도이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상황과 LG전자의 불가피한 결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어도 여전히 웨일즈인 들에게는 당시의 기억이 큰 상처이자 교훈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LG전자는 몇 년 전부터 웨일즈 제 2 도시인 스완지를 기반으로 한 스완지 FC의 후원을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웨일즈 내에서 조금이나마 이미지 개선이 이루어지길 희망해 본다. 스완지의 영원한 라이벌 카디프 인들에겐 여전히 LG전자가 달갑지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