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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 퍼스트 Sep 20. 2016

반곡역의 바쁜 하루

언젠가 사라질 간이역


오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옛 역사부터 바래진 시간표, 한때는 열차가 지났을 녹슨 선로까지. 간이역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 이상 열차가 운행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오지 않을 열차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지난 시간들처럼 그리움 속에만 존재합니다. 덕분에 간이역은 지나간 시간을 더듬을 수 있는 나들이 장소이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추억의 공간으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반곡역은 치악산 바로 아래에 자리한 작은 간이역입니다. 원주를 출발한 중앙선과 태백선 열차가 이곳에서부터 험준한 치악산 코스를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지요. 1941년에 지어진 역으로, 당시의 서양식 목조 건축 양식을 온전하게 잘 보여주고 있는 덕분에 문화재(등록문화재 제165호)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치악산 바로 아래 반곡역


험난한 산자락에 자리한 만큼 반곡역 주변에는 7개의 터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금대 2터널은 뱀처럼 한 바퀴를 돌아 나온다고 해서 ‘똬리굴’이라고 불리는데 흔하지 않은 구조여서 철도 동호인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입니다.


일명 ‘똬리굴’이라고 불리는 루프식 터널의 평면도



반곡역의 마지막 불꽃 


많은 간이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곡역 역시 승객이 감소하면서 2007년 결국 여객업무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선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열차는 탈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다행히 역사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철거되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역과 추억을 나눈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작은 갤러리처럼 꾸며진 반곡역 실내


승객이 줄어들게 된 이유는 반곡역 주변이 대규모 공사장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할까요. 공사가 끝나고 역사 앞에 한국관광공사, 한국광물자원공사 등 공기업들이 들어서면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생겼습니다. 덕분에 지난 2014년 8월, 작은 역에는 다시 열차가 서게 되었습니다. 현재 반곡역에는 상행 4회, 하행 4회, 하루 총 8회의 열차가 머무릅니다. 열차가 자주 서는 것은 아니지만 쓸쓸했을 간이역에게는 분명 반가운 손님들입니다.


출퇴근 시간대면 반곡역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역은 다시, 어쩌면 영영 문을 닫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중앙선 노선은 2018년 평창에서 열릴 동계 올림픽에 맞춰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 구간이 개통되면 열차는 지금의 꼬불꼬불한 노선 대신 곧게 뻗은 철길을 통과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설레는 거대한 축제가 작은 간이역에게는 마지막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열차를 볼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

 

당시의 건축 양식을 온전하게 담고 있는 역사가 치악산의 아름다운 정취와 어우러진 반곡역.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입니다. 봄에는 화사한 벚꽃이, 가을에는 새빨간 단풍이 오래된 역사의 분위기를 더해주기도 하지요. 더운 초여름, 벚꽃과 단풍은 볼 수 없었지만 승강장에 핀 색색의 작은 꽃들이 손님들을 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반곡역이 지나온 시간은 그처럼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역은 일제가 우리의 광물과 농산물, 임산 자원들을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역입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오래된 철도와 역사들은 일제 강점기에 같은 목적으로 지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철도는 낭만적인 여행 수단이지만, 당시 선로를 깔고 터널을 뚫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희생됐습니다. 반곡역 한편에서는 그런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당시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옛 역사를 알려주는 사진들


 

산속 간이역 역무원 


출근 시간이 지난 반곡역은 다른 간이역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조용해 보입니다. 오전 열 시의 열차를 마지막으로, 저녁 퇴근시간 전까지는 이곳에 열차가 서지 않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산속 작은 역. 이곳의 역무원들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요. 현재 반곡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호정(49) 부역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반곡역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하면 얼마나 좋으냐’고 말해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김 부역장님은 지난해 12월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역에서 반곡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이곳에 온 지는 5개월밖에 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전원적인 분위기의 작은 역에서 근무를 하는 것이 절대 한가하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반곡역의 김호정 부역장님


반곡역에 머무는 열차는 아침에 여섯 번, 저녁때 두 번으로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반곡역에 머물지 않을 뿐 화물열차를 비롯한 수많은 열차들이 반곡역을 통과합니다. 이런 열차들은 멈추지 않기 때문에 정말 강하고 빠르게 달립니다. 간이역을 방문한 사람들은 으레 승강장과 역사, 선로의 사진을 찍곤 하는데 이런 통과열차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안전하게 역을 구경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반곡역 역무원들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또한 반곡역 주변에는 유교, 금교, 치악, 세 개의 무배치 간이역이 있습니다. 무배치 간이역이란 역으로서의 기능은 하지만 역무원이 근무하지 않는 역을 말합니다. 이런 역들의 관제를 비롯한 업무들은 반곡역 역무원들의 몫입니다. 여러 역들을 동시에 관리하고 있는 만큼 역무실에는 열차가 오고 가는 것과 관련한 무전이 끊이질 않습니다. 현재 반곡역에는 여섯 명의 역무원들이 두 명씩 3교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역의 관제업무를 보고 있는 이국표 과장님은 이번 6월을 끝으로 은퇴할 예정입니다.


그나마 두 명이 함께 근무를 설 때는 할 만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휴가 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혼자 근무를 서게 되는 날이면 정말 눈코 뜰 새가 없다는데요. 자리를 떠서는 안 되는 관제 업무를 하면서 손님들의 안전도 책임져야 하고, 종종 있는 매표 업무까지 보게 되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조용해 보이는 간이역이지만 이곳의 역무원들은 정말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출퇴근 시간에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매우 바쁘게 움직이지만, 그래도 이곳을 방문해 주는 사람들이 역무원들을 배려해 주는 경우가 많아 한결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급하게 표를 사야 하는 일이 없도록 일부러 열차 시간보다 훨씬 여유 있게 와서 기다려 주기도 하고, 정말 바쁜 날에는 음료수를 건네주는 손님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강원도 인심이 좋긴 좋나 봐요.” 부역장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얼마 뒤면 다시 문을 닫을 작은 역.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고 가며 새긴 반곡역의 모습도 언젠간 추억이 되겠지요. 최근에는 고양이 식구들이 역사 주변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사연들이 쌓이고 있는 이곳이 잠드는 순간까지 평온하길 바랍니다.



‘내 맘대로 포토스팟’ 반곡역 편은 쉽니다

반곡역은 지금도 열차가 운행하고 있는 역으로, 함부로 선로에 들어가면 정말 위험합니다.(철도안전법 위반) 선로 주변과 승강장에서는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역무원의 안내에 따라주세요.




/사진: PJ


오래된 역사(驛史)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역 없습니다. 역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과 열차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역의 모든 공간들, 광장, 로비, 승강장,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사람들의 추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연히 방문하게 된 오래된 간이역, 열차는 보이지 않았지만 역의 곳곳에서 친구들, 연인들,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낙서들이 보입니다. 오래된 역사(驛舍)의 역사(歷史)에 귀 기울여 보시죠.



"오래된 시간을 찾아 떠나는 간이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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